▲ 필립 샌즈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1945년 11월20일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량 학살과 반인륜 범죄에 대한 역사적인 재판이 펼쳐졌다. 이 재판으로 나치 전범들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졌는데, 14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중 12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나치 전범들에게 주어진 죄목과 판결은 당시 새롭게 등장했던 '인류에 대한 범죄'와 '제노사이드(민족 말살)'라는 개념에 의한 것이었다.

이 책은 '인류에 대한 범죄'와 '제노사이드'라는 개념들을 만들었던 두 명의 법학자들과 저자의 외조부가 우연히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고 한다. 저자 필립 샌즈는 국제 인권 변호사이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교수인데, 국제법 특강을 위해 우크라이나 리비우를 방문했다가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였고, 그의 가족들이 참혹한 과거의 기억을 애써 감추려 했었다는 사실도 접하게 되었다. 가족들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행로와 리비우 대학에서 동문수학한 두 법학도가 뉘른베르크 군사 법정에서 등장하게 될 '인류 정의의 기준'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의 현장을 찾아다니는 저자의 여정이 전개된다.

리비우는 저자 외가의 고향이자, 국제법의 중요한 개념인 '인류에 대한 범죄'와 '제노사이드'를 연구한 두 명의 유대계 법학자, 렘킨과 라우터파하트가 살며 공부했던 곳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리비우는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유대인 등의 민족들이 함께 살아왔던 곳으로, 오랜 전쟁과 침탈의 역사 속에서 그들을 지배하던 자들의 언어에 따라 렘베르크, 로보프, 리보프, 리비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지역이다. 저자와 두 학자의 인연 속에 악역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다름 아닌, 히틀러의 개인 변호사이자 나치 독일의 폴란드 총독을 지낸 '폴란드의 도살자', 한스 프랑크였다. 그는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말살을 명령한 장본인이며 저자의 외가와 두 법학자의 일가도 그 명령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저자는 취재 과정에서 프랑크의 아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기도 했으니 역사 속에 사는 개인들의 우연한 인연들이 이 책의 앞과 뒤를 관통하고 있다.

저자는 나치에 점령된 리보프에서 유대민족이 몰살되었던 사실을 규명하고 기소했던 과정을 추적하였으며, 나치가 저지른 범죄의 범위를 규정하고 죄명을 확정했던 렘킨과 라우터파하트의 노력을 생생하게 서술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서 같은 교수에게 배웠으나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를 단죄할 법리를 찾아내려는 의지는 공유했으며, 그들이 만들어 낸 '인도주의 법'은 암울한 현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혁명적 개념이었다. 전범 재판에서 이 개념을 적용하여 나치 전범들을 단죄한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이들에게 '현대 인권 운동의 아버지'라는 명예가 주어졌다. 다만 이들이 살아있어,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반인륜적인 제노사이드를 지켜보고 있다면, 인도주의 법의 실효성과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이효준 월급쟁이 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