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창호 송암미술관 학예사.
▲ 연창호 인천도시역사관 학예사

오늘날을 문화예술 시대라고 한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과 문화의 경계는 날로 모호하지만 여전히 문화 경계는 존재하고 서로 다른 문화끼리 경쟁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민족과 문화에 우열은 없으나 영향을 주는 문화예술은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문화예술 시대에 한국의 미는 무엇일까.

동·서양 문화가 만나는 것은 필연이다. 문제는 서양문화의 이원론적·분석적인 문화가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이다. 서양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서양은 부족한 점을 동양에서 찾고 이를 보완해 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서양 것을 신주처럼 모시고 거기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필자는 한국의 미가 무엇인지 그 길을 처음 개척한 우현 고유섭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현의 대학 졸업논문은 예술활동의 본질을 묻는 논문이었다. 때는 1930년, 그의 나이 25세였다. 한국미술사를 연구하기 전에 그는 자기만의 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술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서로 달라 보이는 모순적인 것조차 대립으로 보지 않고 상보적인 관계로 보았다. 지성과 감성 등 인간의 모든 삶이 녹아 있는 것이 예술이므로 인간 삶을 둘러싼 생활감정의 이해작용이 예술이라는 관점이다. 이것이 청년 우현의 생각이었다.

우현은 학창시절에 우리 미술사를 연구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았다. 중국, 일본과 다른 한국의 미가 무엇일까에 마음이 끌려 이를 찾는 것을 자기 생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 결과 당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미학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절실하게 생각하면 몰입하게 마련이고, 몰입에서 독창성이 터져 나온다.

우현이 25세 때 쓴 학부 졸업논문에 '전통'에 대한 말이 있다. 전통이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하지 못하고 '양식'으로만 계승하면 그 틀에 갇혀 버리고 질식하게 된다. 결국 예술의 본질을 잃게 되어 전통의 타락이 일어난다. 전통은 위대하나 그것을 신격화하면 우상이 된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시대에 따라 변용해야 한다. 이것이 우현의 생각이었다. 이 생각은 계속 천착 되어 10년 후에 한국미술사의 '전통'에 대한 인식으로 나타난다.

우현은 예술이 무엇이고 우리 미술과 전통이 무엇인지를 계속 질문하였다. 우현에게 예술은 유희가 아니다. 우현은 삶이 풍요로워 여가에 취미를 즐기는 '고상한 유희'가 예술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예술이 유희라는 것은 예술에 대한 모욕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예술관을 들어 보자.

“조선의 미술은 수천년간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이다. 절대 여유에서 나온 생활의 잉여잔재(유희)가 아니다. 한 개의 예술을 낳기 위해 쇄신각골하고 발분망식하여 나온 것이다.”(아포리스멘) 그에게 예술은 고난이든 기쁨이든 삶 자체다. 삶에서 우러난 생활감정의 이해 작용이 예술이라는 기본적 시각을 유지하고 우리의 미술은 민중의 삶 자체라는 발언이다. 민중의 생활과 예술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이다. 한국 미술은 우리 삶과 생활을 표현해 온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현에게 우리 고미술은 우리 역사의 피와 땀이 어린 악전고투의 산물이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전통이란 공놀이를 하는 것처럼 손에서 손으로 손쉽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전통은 오히려 '피로서' '피를 씻는' 악전고투를 치러 '피로서'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얻으려 하는 사람이 고심참담, 쇄신분골하여 죽음으로써, 피로써, 생명으로써, 얻으려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요, 주고 싶다 하여 간단히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조선미술문화의 몇낱 성격)

우현은 예술의 본질을 묻는 글을 쓴 이후 15년간 피로서 글을 썼다. 그리고 해방을 1년 앞두고 39세에 졸(卒)했다. 피로 쓴 그의 글은 여전히 혼이 있고 정신이 살아 있다. 피로 썼기 때문이 아닌가.

/연창호 인천도시역사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