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성현 전 매일노동뉴스 대표
▲ 부성현 전 매일노동뉴스 대표

대선 후 치러지는 국회의원 선거는 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의 의미를 띤다. 정권 심판, 아니면 정권 안정을 선택할지 민심은 윤석열 정부를 있는 그대로 평가할 것이다.

선거를 민주주의 꽃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국가의 주권자인 시민이 직접 투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얘기할 때 많이 거론하는 명구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 있다. “시민의(of the people) 시민에 의한(by the people) 시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키워드는 '시민을 위한'이 아니다. '시민에 의한'이라고 정치학자들을 말한다. 정치 주체를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에 의한 통제, 시민에 의한 권력행사를 통해 시민의 정부를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 노정(路程)이란 얘기다. 정치인의 시민을 위한 헌신보다는 정치 주체인 시민에 의한 정치가 민주주의 본질에 가깝다는 뜻이다.

'민주주의(Democracy)' 어원은 그리스어 '데모스 크라토스(Demos Kratos)'에서 유래했다. 데모스는 시민(인민·민중)을, 크라토스는 권력(지배)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곧 시민권력이라는 뜻인데,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오고, 시민에 의한 지배와 시민에 의한 직접 정치가 가능한 정치체제를 일컫는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말이나 현대 국민국가에서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 같은 시민의 직접 정치는 불가능하다. 시민은 나라마다 수천만 명에서 수억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 그들은 생계·사적인 책무를 다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낸다. 시민이 한데 모일 공간과 시간적 제약도 있다. 관심을 둘 공적 이슈들은 복잡하고, 그런 이슈는 무수히 많다. 이를 처리하는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구조는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시민 대표인 시장, 국회의원, 대통령을 뽑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한다.

그런데 그들을 잘 못 뽑게 됐을 때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민생과 평화는 위기를 맞는다. 민주주의는 이렇듯 오류를 반복하며 변화하고 발전한다. 민주주의는 시민을 위해 만들어졌다.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이 만들어진 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다수 지배의 원칙이 작동하는 체제다. 그러기에 정치는 300명의 국회의원과 그들이 속한 정당이 전유하는 사유물이 될 수 없다. 모든 인민의, 민중의, 시민의 민주주의다.

정치의 주요 무대인 국회는 법과 제도를 만든다. 그리고 예산을 심의한다. 돈을 어디에 쓸지 정하는 곳이 국회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나랏돈을 어디에 쓸지를 누가 정하는가? 그 돈을 버는 사람들이어야 할까? 시민은 그 결정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만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소득을 재분배할 수 있다. 국가 예산을 결정하는 국회에서 그 예산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지가 정치가 담당하는 중요 역할 중 하나다. 그에 따라 누구를 위해 정치를 하는지, 누구를 대변하는 정당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기득권 특권층이 아니라 절대다수의 시민에게 이로운 예산이 수립될 때 더 많은 시민을 위한 법과 제도는 당연히 뒤따라오게 된다. 또한 시민을 위한 법과 제도라도 그에 수반되는 예산이 국회에서 정확히 집행되는지를 감시하고 통제해야 민주주의는 성숙단계로 접어든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다. 정치는 필요악이 아니다. 정치혐오와 정치불신은 '그냥 이대로'를 원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정치혐오를 의식적으로 조장해 온 세력이 바로 민주주의의 적이다.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야말로 기존의 낡은 질서에 순응케 하고, 기득권 질서를 유지코자 하는 세력이 바라는 최적의 환경이 아니겠는가. 전갱이가 상어에게 이기는 것은 수천수만 마리가 떼 지어 다니기 때문이다. 작은 물방울이 모이고 모여 내를 이루고 강을 만나면서 바다로 향한다. 시민이, 민중이, 인민이 우리를 대신할 호민관을 제대로 뽑아야, 전갱이가 상어를 이긴다.

/부성현 전 매일노동뉴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