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120년 전 갑진년(1904년)에 동학이 중심이 되어 진행된 대중운동을 '갑진혁신운동'이라 부른다. 그해 2월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해 러시아 배를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그 흐름 속에서 사회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일본 망명 중이던 동학 교주 손병희가 국내에 지령을 내려 4월부터 전국적으로 민회(民會)가 조직되어 나갔다. 1890년대 교조신원을 위한 취회에서 비롯된 민회는 이 시기에 이르면 개화혁신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으로 발전해 있었다.

민회는 처음엔 대동회라 하였으나 7월 들어서는 중립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동회든, 중립회든 집권세력은 기겁한 모양이다. 20년 전 동학농민의 기세를 상기시켰기 때문일 터이다. 대한제국은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손병희는 8월 이용구를 귀국시켜 중립회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진보회로 바꾸도록 했다. 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전국의 진보회원이 11만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갑오년에 30만이나 희생되었는데도, 다시 11만이 뭉치기 시작했으니 놀란 지방관들은 '토벌'에 나서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진보회는 강령에서 첫째,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 기초를 공고히 할 것, 둘째, 정부를 개선할 것, 셋째, 군정·재정을 정리할 것, 넷째,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할 것 등을 요구했다. 당시 관점으로 보더라도 반국가·반정부라 할 만한 요소는 찾기 힘들다. 정부를 일신하여 독립적이고 인민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나가자는 주장일 따름이다. 회원들에게는 상투를 자르고 흰옷 대신 검은 옷을 입는 생활개선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은 진보회 간부와 회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구금했다.

진보회의 뒤끝은 씁쓸하다. 1904년 8월에 조직된 송병준의 일진회가 나서서 진보회 구명운동을 벌여 모두 석방시켰다. 진보회는 결국 그해 12월 일진회에 흡수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일진회는 대한제국 말기 가장 적극적인 친일단체였고, 송병준은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매국노였다. 손병희는 1906년 귀국 후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었고, 일진회원들을 모두 교단에서 몰아냈다. 진보회를 이끌었던 이용구는 동학에서 쫓겨난 뒤 시천교를 만들었다.

두 갑자 120년을 돈 2024년에 갑진혁신운동을 새삼 돌아봐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하지만 갑진혁신이 성공을 거두었더라면 이듬해 그리 쉽게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하게 된다. 청룡의 해라는 이번 갑진년에도 혁신이 절실하다는 이 느낌 역시 부질없을까.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