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종도지구 전화 공사공급 계통도.
▲ 영종도지구 전화 공사공급 계통도.

불은 과학에서 빛과 열을 내는 에너지로서 산소와 물질이 화합하여 연소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불은 인류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인류문화사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어둠을 밝히는 조명용, 추위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는 난방용, 음식물을 익혀 먹는 조리용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불은 사람을 모이게 하고, 사회를 형성하는데 촉매 역할을 하였다.

불의 발견과 이용으로 첫발을 내디딘 인류는 전기 에너지가 실용화된 19세기 이후 조작의 편리성과 다른 에너지로의 변환 용이성, 환경 보존 및 상대적인 안전성 등의 특성으로 인하여 그 이용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여 인류 문화를 급속히 변모시켰다.

 

우리나라에서 전기의 역사

세계 최초로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지 8년 만인 1887년에 경복궁 건청궁(乾淸宮)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불을 밝혔다. 당시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건청궁을 밝힌 전등은 묘한 불이라서 '묘화(妙火)', 괴상해서 '괴화(怪火)', 건들거리면서 자주 꺼져 '건달불' 등으로 불렀다. 전력을 이용하여 열, 빛, 동력 등을 얻는 전화(電化) 사업의 빛이 궁궐에서 시작되었지만 옹진군 북도면에는 언제부터 시작되어 밤에도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었을까?

 

북도면의 전화(電化) 사업

우리나라는 구한말 전기가 도입된 이래 전국의 도시와 공업지역을 중심으로 전력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만 하여도 전력공급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농어촌지역이 상당히 많았다. 1964년 말까지 전화 호수는 농어촌이 31만8000호로서 농어촌의 전화율은 12.0%에 불과했다.

따라서 국회는 농어촌 생산력 증강 및 생활향상 도모를 위해 1965년 '농어촌 전화촉진법'을 제정하였고, 마침내 북도면은 1970년대 말 정부시책으로 농어촌 전화사업 계획에 따라 추진되었다. 당시 경향신문(1979.12.22)에 의하면 '옹진군은 어촌전화사업 계획에 따라 융자 22억1387만 원과 주민부담 2억6744만 원, 한전부담 1억9369만 원으로 인천~영종도 간 수중케이블 공사로 전기를 가설…(중략)…북도 745가구가 전깃불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인 시점에 나온 것으로 보이며, 북도면의 전화 사업에는 당시 최영윤 면장의 뚝심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전력공사 인천지점에서 영종·용유 전화 시설 계획을 추진하고 있음을 인지했던 최 면장은 당시 고향이자 근무처인 북도면이 이 시기를 놓치면 전화 사업이 요원할 것 같아 한전에 몇 차례 건의하였다. 마침내 한천 인천지점장으로부터 영종·용유지역을 시공할 때 북도면도 동시에 착공하겠다는 확답은 무난히 받았다.

당시 이 공사를 담당했던 한전 책임자는 영종도 출신의 김기호 씨였으며, 이 사람이 내부적으로 북도면을 위해 많은 힘을 써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화 사업의 문제는 가구별 자부담이었다. 당시 조건이 가구당 각 8만 원의 자부담에 75만 원 5년 거치 25년 균분 상환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면내 유지들과 협의하였다. 그 결과 자부담 8만 원 부담이 어려울 것이라 하여 다음 기회로 연기하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최영윤 면장은 면장의 직을 걸고 이 기회에 전기를 끌어들이자고 주장하여 마침내 전기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사업 착공은 1979년, 준공 및 시험 시동은 1980년 9월20일이며, 점화는 1980년 11월28일 이뤄졌다.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이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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