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브국립대 교수.
▲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교수

혁명 시인 마야콥스키를 좋아하던 시인 친구는 자신은 소련 공민이라고 이야기하고 우크라이나 독립 후에도 낫과 망치 문양이 있는 붉은색 구소련 여권을 가지고 다녔다. 구소련권에는 우리나라같이 주민등록증이 없고 2개의 여권이 있다. 하나는 국내용으로 거주지 등록이 되어있는 여권이고 하나는 해외 여행할 때 쓰는 여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민등록증 외에도 운전면허증이나 직장 증명서도 통하지만, 만약 구소련 지역 경찰이 심문하면 꼭 여권을 내밀어야 한다.

지난주 옛 지도교수님 생신이라 생일잔치에 다녀왔다. 20년 넘게 해마다 초대되는 잔치인데 이 모임은 소련 공민의 모임이다. 1990년대 말 필자가 처음 갔을 때 만났던 사람들의 면면이 심상치 않다. 교수님 아버님은 예전에 서부 지역 르비브지방 제1서기였다. 어머님은 교장선생님을 하셨고, 교수님 사돈인 토마라 여사는 전 경제대학 총장, 교수님 친구인 소피아 선생님은 우크라이나 아카데미회원, 타냐 아주머니도 교수를 역임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구소련 시절 국회의원을 하셨다. 사촌 동생 세르기이는 국가공훈 연극배우고 언니 슈라 아주머니는 도서관장을 하셨고 그녀의 남편은 문화부 차관을 하셨으며 남동생은 독일 대사를 했고 그의 부인은 유명시인이다.

생일잔치에서는 많은 꽃과 선물이 오가고, 성대한 음식이 마련된 자리에 앉으면 제일 어른이신 교수님 아버님이 딸의 생일을 축하하며 레닌과 스탈린 어록을 몇 마디 하고 건배를 했다. 돌아가며 한마디씩 덕담을 하는데 푸시킨과 마야콥스키의 시를 암송하고, 간혹 노래도 불렀다. 그리고 술이 돌고 음식을 먹으며 소련 시절의 이야기로 정신없이 빨려들었다. 그들의 전성기는 브레즈네프(재임기간 1964-1982)시대이며 당시 향수에 젖어 건배했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시간은 흘러 교수님의 아버지 어머니를 시작으로 주위 분들이 돌아가셔서 10여 년 전부터 초대 인원이 줄기 시작하더니 올해는 교수님, 연극배우 세르기이 이웃 타냐 아주머니와 우리 부부 그리고 도우미 아주머니까지 모두 여섯 명이 모였다. 생일잔치라기 보다 조촐한 저녁 식사 모임 같았다. 쟁쟁하던 소련 공민 여러분이 돌아가셨다.

아파트 근처 대학 기숙사에는 우리끼리 돌쇠라 부르는 관리 아저씨가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소련 군대의 부사관으로 35년 근무하다 마지막 근무지가 대학 군사학교였는데 모시던 상관이 정년퇴직하며 기숙사 총감독으로 오면서 기숙사 관리인으로 따라왔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청소하는 아저씨를 보았는데 얼마 전 돌쇠 아저씨 부인이 운동 가는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콜랴가 뇌졸중으로 죽었어” 전쟁으로 의료 환경이 안 좋은 상황에서 응급차를 불러 병원에 갔지만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우리 시골집 다차 이웃인 사샤 아저씨는 손기술 좋은 물리학자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고에도 투입되어 훈장을 받았는데 그 후유증인지 무거운 물건을 못 들고 몸이 좀 약하셨다. 그러나 다차를 재건축하려는 의지는 강해서 시골집을 2층으로 올리려고 작업했는데 완공도 못 하고 며칠 전 돌아가셨다.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우리나라같이 밤샘하지는 않고 시신을 관에 누인 상태에서 약 1시간 정도 추도사를 하고 신부님이 기도하고 매장지로 향했다. 깨끗하고 창백한 사자(死者)의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다.

구소련 지역의 나이 70이 넘으신 어른들은 1990년 이전에 모두 소련 공민이었다. 코로나로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금도 열악한 의료체계 아래에서 죽고 있다. 그나마 구소련 공민들은 공화국마다 구시대 유물인 사회주의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는데 이분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15개로 독립한 각국은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더 많은 분쟁 분열 갈등과 함께.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