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가장 비범하고 열정적인 개척자였고, 가장 고독했던 문화독립운동가였다. 민족혼을 지킨 불멸의 혼이다. 역사의 질풍노도가 몰아치던 개항도시 인천에서 태어나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조국의 미술사를 개척하려고 외로운 길을 걸었다.”

인천이 낳은 석학 우현 고유섭(高裕燮·1905∼1944년)에 관한 소설가 이원규의 평이다. 이 작가가 이번엔 <고유섭 평전>을 세상에 내놓아 관심을 모은다.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조봉암 평전> 등을 낸 그다. 인천 출신 동향 선배의 발자취를 그렸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짧은 생애에도 민족 미술사의 토대를 닦고 한국 미의 정체성을 확립한 우현의 삶을 꼼꼼하게 되살렸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민족 문화의 정수를 밝힘으로써 겨레의 자존을 챙겼다고 그는 적었다.

우현은 1925년 경성제대 예과에 합격한 뒤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그가 인천에서 기차로 통학한 보성고보 시절 미술 담당 교사였던 화가 춘곡 고희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경성제대를 졸업한 뒤 모교 미학연구실 조교로 근무하는 한편 문헌 탐구와 현장 답사를 병행하며 미술사 지식을 쌓았다. 그 후 1933년 이례적으로 20대 후반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취임했다.

앞서 우현은 1931년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과 '조선탑파 개설'이란 글을 발표했다. 한국 미술사를 개척하기로 마음을 먹고 쓴 논문이었다. 특히 탑파 연구는 숨지기 전까지 붙잡았던 필생의 숙제였다. 그는 조선 초기 유행한 자기에 '분청사기'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문헌 탐구와 현장 연구를 병행한 끝에 우현이 내린 조선 미술의 특징은 '질박·담소·무기교의 기교'로 집약된다. 조선 미술이 신앙·생활과 구분되지 않고, 민예적 성격을 지닌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는 '한국 미술사'를 일군 선구자였다.

이런 우현을 기려 인천시립박물관 앞바당엔 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새얼문화재단이 1991년 '새얼문화상' 1호 수상자로 선생을 선정하고 그의 동상을 세웠다. 아울러 인천에선 우현을 추어세우려고 학술상도 제정됐고, 우현로란 길 이름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만큼 인천에선 그를 '문화명품'으로서 칭송하고 자랑스러워한다. 이밖에 우현에 대한 학술전집이나 기록 등은 도처에 보인다.

“우현(又玄)은 검고 또 검다는 뜻이에요. 인천의 경우 가진 물질에 비해 정신이 빈곤하다고들 하는데, 나는 우현을 연구하면서 대한민국의 얼과 인천 혼의 품격을 다시 봤습니다. 그것으로 다시 무장하고 되새길 때 우리는 달라질 수 있을 테죠.”

이원규가 책을 낸 후 본보 인터뷰에서 한 말이 그윽하다는 현(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