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병구 인천석남중학교 교장
▲ 임병구 인천바이오과학고 교사

바다 위에 줄을 긋는 일 같다 할지언정 흐르는 시간을 잘라내 놓고 보면 새 기운이 돋기 마련이다. 누구도 청룡을 만날 수 없다 해도 용 그림 한 점 주고받으며 푸르게 비상하는 영물을 떠올려보는 일은 상서롭다. 연말연시, 백설을 맞이했다고 새해가 흰빛처럼 무구할 리 없어도 맘속에 시리도록 깨끗한 백색을 채워두는 출발이야말로 거룩하다. 루쉰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지만 눈길 위에 먼저 찍힌 발자국이 내뿜는 자상한 친절은 뒤따르는 이들에게 복이다. 조심스레 앞걸음에 내 발자국을 포개는 일도 그렇고 과감하게 새 길을 내며 또 다른 발자국을 남겨도 좋을 일이다.

2월 졸업식이 1월로 옮겨지며 새해 벽두에 졸업 시즌을 맞았다. 새해 시작과 학생들의 새로운 출발이 겹쳐져 격려 자리가 더 풍성하다. 나이 한 살 계단을 오르는 학생들 어깨 아래 날개가 돋듯 차오르는 기운이 느껴진다. 당당하게 주민증을 제출하고 성인 출발 음주를 했다는 졸업생과 나눈 새해 첫 대화가 해장 비법이다. 졸업식장에 가야 하는데 술이 안 깬다는 그가 속풀이 방식에서 내 뒤를 따르든 말든 머리 안 아프고 속 편할 그의 음주 꽃길을 응원한다. 운전면허를 취득해 보란 듯이 운전대를 잡고 교문을 빠져나간 졸업생과 가족들이 운동장 눈밭 위에 남긴 궤적을 들여다본다. 힘차게 밟은 엑셀이 치고 나간 자리가 깊고 선연하다. 그가 밟아 갈 삶의 길 위에 남길 패기와 자신감이 이와 같기를 축원해 본다.

선배들이 떠나간 빈자리가 눈에 뜨일 때 후배들 걸음이 보인다. 도대체 도서관 서가 정리는 언제 배울지 선배 애를 태우던 후배가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 학교 카페에선 앞치마를 두른 남학생 후배가 설거지를 도맡아 한다. 선배들이 궂은일만 시키지 않느냐 물으면 생긋 웃는다. 들어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일을 익히는 과정이라고, 집에서도 하게 된다니 제대로 배우는 중이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선배들 뒤를 차근차근 밟고 있단다. 진급은 두려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성장을 기대하는 눈빛을 감추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이 학교에서 최고 어른'이라고 은연중에 최고 학년임을 자부하는 2학년은 자연스레 3학년만큼 여물 것이다. 자신들보다는 선생님들을 덜 괴롭히는 신입생들이 와야 한다고 염려하는 1학년은 이미 2학년으로 성장해 있다.

새해 덕담을 나누는 자리가 이어진다. 아이들이 우리 미래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아이들 미래여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후배 예술가에게는 7살 늦둥이가 있다. 시절이 수상하고 앞길이 희미할 때, 자신의 손을 그러쥐고 있는 어린아이는 그를 희망하는 존재로 담금질할 것이다. 우리는 학생들이 공들여 내놓은 뮤지컬(인천 청소년뮤지컬단 6회 정기공연, '엄마')을 함께 감상했고, 중고생들이 연기한 다문화 모녀가 갈등하다가 결국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어른이란 무엇인가 물었다. 엇나가는 딸 앞에서 엄마는 속수무책이지만 아이는 어른이 밟은 길을 따라 천천히 온다. 손웅정이 새해에 던진 말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성장한다.”

새해에 어울리는 새해의 말은 새롭기에 낯설 수 있다. 채현국 선생님이 “꼰대들에게 속지 마라”고 세대에 안주하려는 시류를 쏘아붙였을 때 환호했던 이들은 나이를 넘어선 패기, 기득권에 갇히지 않는 용기에 열광했다. 그저 그렇게 어른 노릇 하려던 보통의 감성을 뛰어넘은 말이라서 지금껏 울림이 크다. 김장하란 이름 앞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으로 남은 '어른'은 새해에도 그립게 호명될 단어다. 당분간, '줬으면 그만이지' 만큼 생동하는 어른의 언어를 만나기 쉽지 않다. 나이를 거꾸로 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따라 해 봄직한 어른들의 말로 새해를 연다. 한 살 더 먹었으니 어른의 말을 익히라고 새해 설날이 눈길 따라 또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다.

/임병구 인천바이오과학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