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브국립대 교수.
▲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교수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Wailing wall)이 있다는데, 세상 여러 곳에 통곡의 벽이 있다. 우리나라 휴전선 철책이야말로 가장 상징적이고 비극적인 통곡의 벽이다. 철책 근무 시절 새들은 철책 위로 훨훨 날아다니는데 초소에서 소총을 들고 느끼던 비애를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철책에서 먼저 군 복무를 하신 형님은 별자리에 관한 책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신 낭만주의자였다. 1970~80년대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나 많은 민주인사가 취조당하고 고문당하던 보안분실의 높은 벽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통곡의 벽이었다.

아우슈비츠의 전기가 흐르는 철망 벽은 수용소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통곡과 절망의 벽이었을 것이다. 헛구역질하고 눈물을 흘리며 아우슈비츠를 둘러보던 때가 생각난다. 아들은 차라리 안 보겠다고 휴게실로 도망갔다. 소련 시절의 강제수용소나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독재자들이 사상범들을 가두는 감옥은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는 통곡의 벽이자 죽음의 벽이었다.

키이우에는 500여 개가 넘는 교회가 있지만 그중 역사적이고 아름다운 교회로는 10~11세기 건축된 성 소피아 사원과 뻬체르스카 수도원 그리고 안드렙스카 교회와 성 미하일 교회가 있다. 그중 미하일 교회 입구 벽에는 새로이 키이우 통곡의 벽이 생겼다. 보통 추모의 벽이라지만 나는 통곡의 벽이라 칭한다. 2014년 몇몇 동부지역 전투 사망자의 사진을 걸고 수도사들이 애도하고 기도하며 시작된 벽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사망자가 급증하며 사진이 나날이 늘고 있다. 지금은 교회 벽 거의 끝까지 사진이 붙어 있다. 우크라이나나 러시아는 자국의 전사자 수를 정확히 발표하지 않지만, 사진으로만 봐도 수만 명이 넘는다.

그중에는 나의 제자도 있고 제자이자 동료 교수였던 사람도 있다. 누군가의 아버지, 아들, 손자, 어느 미망인의 남편 사진이 걸려있다. 키이우를 방문하는 여러 나라 대통령 및 수상들이 경배하고 헌화하는 곳인데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여러 사람이 자기 가족과 지인 선후배 친구 애인과 남편을 찾는 곳이다. 드문드문 여 전사자도 보인다. 특히 이승 사람이 아닌 사진은 잘생겼고 아름답다.

필자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다른 나라의 전쟁이 아니다. 내 친구들과 동료들이 참전했고 나의 제자들이 전쟁에서 죽음이 되어 돌아오는 길목에서, 못난 선생으로 통곡하는 전쟁이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이 통곡의 벽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지나친다.

제자 세르기이는 나에게 이야기했다. “선생님 저는 죽으러 전쟁에 갑니다. 저의 조국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으랴, 살아서 만나자던 약속은 깨지고 그는 키이우 통곡의 벽에 한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전쟁이 2년 가까워지며 통곡의 벽에 붙이는 사진이 늘어 이제는 공간도 좁아지고 있다. 얼마나 더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 이 통곡의 벽에 그들의 사진을 붙일 것인가.

전선에서 병사의 시체를 처리하는 근무자는 이제 눈물도 말랐다며 우크라이나든 러시아든 죽은 병사들의 시신에 숫자를 쓰고 신원 파악하는 일이 너무 괴롭고 힘든 일이라고 고백한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특히나 젊은이들이 눈에 많이 띈다. 20~30대의 화사한 젊음이, 교활한 정치인들의 덫에 걸려 죽음의 굴레로 말려든다. 어느 군인은 철모에 어머니 사진을, 애 아버지 군인은 젖은 지갑에 아기 사진을, 어느 젊은 군인은 가슴에 애인 사진을 품고 죽는다.

왜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전쟁은 그치지 않는 것일까? 이스라엘에서 가자 지구에서 우리나라 철책에서 미얀마 산중에서 시리아에서 아프리카 분쟁지에서….

나도 통곡의 벽에 나의 사진을 걸고 싶다.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