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짓도 안 하려고
바람이 분다
손톱을 깎으려고 양치질을 하듯이
바지를 벗으려고 안경을 닦듯이
아무짓도 안 하려고
비가 온다
여드름을 짜려고 발모제를 바르듯이
소풍을 가려고 우산을 그리듯이
▶제목 '소요유'가 암시하듯이, 아무런 얽매임이 없는 절대 자유의 경지를 보여주는 시이다. “아무 짓도 안 하려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니! 인과성이 전혀 없다. “손톱을 깎”는 행위와 “양치질을 하”는 행위나, “바지를 벗”는 행위와 “안경을 닦”는 행위 또한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다. 우리의 삶을 절대적으로 규정짓는 질서나 가치는 없다. 우연적인 것들의 연속이다. 관련이 있다는 것, '필연'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연'이 반복되어 나타날 때 그 연관성(규칙)을 추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의 구절들은 인과적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대등적으로 읽어야 한다. 수수께끼를 풀듯이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시된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묘사가 당혹스럽기도 하겠지만, 세부 묘사를 새롭게 배열하고 강조함으로써 현실인식을 미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현실이 파편들로 구성되어 있을 때, 조화로운 총체성이나 보편성을 꿈꿀 수 없을 때, 우리가 그 현실을 견디는 것 또한 총체성이나 인과성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럴 때에 이 시간, 이 순간이 소중해질 수 있다. 당신은 어느 순간에 위치하고 있는가. 새해가 밝았다.
/강동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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