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에서 도당굿은 마을 수호신인 도당신에게 뜻밖의 재앙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구하고자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며, 남자 세습무(世襲巫)인 화랭(무당)이가 주도하여 강신여무(降神女巫)인 미지와 함께 굿을 이끌어가는 것이 뚜렷한 특징이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이 다 같이 굿에 참여하고, 마을굿을 통해 주민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의 장이 되기도 하여 마을 축제의 성격이 강하다. 아울러 남녀노소가 모두 참여하고 어울리면서 마을이라는 지역성을 토대로 동질감을 갖게 되고, 그 지역사회의 위계질서를 새삼 확인하는 기능도 갖는다.

전통시대에 이런 마을공동체 신앙이 중요한 기능을 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도당굿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다가 사라졌을까? <북도교회100년사>에 도당굿과 관련한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도당굿 준비

도서 지역 사람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먼바다에서 험난한 물결과 싸우며 늘 위험과 공포 속에 지냈다. 이런 이유로 개인은 자연스럽게 신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고, 그 형태가 샤머니즘의 일종인 상산본향신을 숭배할 때 가정에서 매달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했다. 1년에 한두 번씩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집도 있으며, 마을에서는 합동으로 신단(神壇)을 만들고 음력 정월 초부터 십여 일간을 도당굿 준비 기간으로 설정했다. 또한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외출을 방지하는 뜻에서 금족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굿을 준비하는 과정에선 마을 사람들이 의견이 달라 감정과 이해관계가 대립하였는데, 당산의 신당에 자신들 멋대로 신단을 따로따로 정해 이중삼중의 경비를 소비하는 경우가 있었다.

 

도당굿 내용

일명 고창굿이라 부르며, 이 굿에 종사하는 여무(女巫)는 무당(巫堂), 만신(萬神), 단골, 혹은 무녀 등 20여 가지의 명칭이 있으며, 남무(男巫)는 박수, 기대, 화랑(花郞), 복술(卜術) 등 28종의 명칭이 있었다. 굿을 하는 기구중에는 장구, 북, 소고, 징, 제금, 방울 등이 있었다. 그중 장구, 북, 소고 등의 소음은 순한 귀신을 부르는 소리이고, 징, 제금, 방울 등의 쇳소리는 약한 귀신을 제기시키는 소음이라 하였다. 굿거리에는 내림굿, 부정굿, 제석굿, 마마굿, 북두칠성 등 12거리가 있다.

 

도당굿 제물

4개의 섬에도 도당굿 내용이나 방식, 신명(神明)은 별 차이 없으나 제물에 대해서는 각 동리에 소산물(所産物)이 모두 달랐다. 신도리는 소가 많아 소를 제물로 택하였고, 시도리는 큰 돼지를 세 마리씩 택하여 아래, 위 동네에 여섯 마리의 큰 돼지가 제물로 도살되고, 모도리는 소·돼지가 없는 곳이라 동네 앞바다에서 잡은 숭어로 제물을 대신하였다. 장봉리는 신도처럼 소를 잡아 제물로 사용했다.

 

기독교와의 갈등과 소멸

북도면 네 개의 섬에서 도당굿의 소멸은 기독교의 유입 및 기독교인의 증가와 밀접하다. 도당굿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의 비협조가 있어 박해를 가했고, 심지어 학교 교원인 정덕여 선생님이 주일 학생을 지도한다는 이유로 교원과 주일 학생이 퇴학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교회와 학교 사이에 갈등의 문제로 커졌고, 1939~1940년 당시 조창덕 면장과 고재옥 신도간이학교 교사(당시 영종심상소학교장 오가사와라 료스케·小笠原良助)가 타협하여 화해하게 되었다.

즉 당시로선 신문화가 유입되어 정착되는 과정에서 신앙 사이에 충돌과 병존이 지속하다가 기독교인의 증가로 자연적으로 굿의 풍속은 미신 숭배로 취급되어 사라졌다. 다만 시도리는 교회가 맨 뒤에 세워졌기 때문에 1945년까지 형식을 유지하다가 1948년 완전히 사라졌다.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