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영이 서울대학교 건축도시이론연구실 연구원.
▲ 유영이 서울대학교 건축도시이론연구실 연구원

한 해를 마무리하며 바쁜 일상을 벗어나 지리산 남쪽, 하동으로 여행을 나섰다. 화개장터를 지나 골짜기를 오르니 '대한민국이 숨겨놓은 보석, 하동'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과 따스한 햇살이 만나는 화개면에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차밭 경관이 드리워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 차나무의 시배지라는 쌍계사 주변으로 차를 만드는 제다인(製茶人)들이 터를 잡고 있다. 차밭을 찾아 떠난 여행 주제에 맞게 숙소는 제다를 하시는 분의 집 한편에 머물렀다. 맑은 시냇물 소리와 뜨끈한 방바닥이 할머니댁에 놀러 온 듯한 연말 휴식을 선사했다.

첫 만남에 데면데면했던 주인은 이내 차를 선보이며 좋은 말동무가 되었다. 다양한 차를 맛보며 하동의 사람과 차에 대한 이야기는 여느 티타임의 주제보다 더 달고 의미 있었다. 30년 동안 제다에만 집중하던 부모님의 공간 한편을 공유 숙소로 제안한 것은 아들이었다. 서른 살이 된 아들이 함께 차를 만들겠다고 도시에서 다시 하동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아버지의 업을 이어받은 아들의 모습, 부자의 따뜻한 정성이 찻잔에 함께 담겨있는 듯했다.

하동에서 나고 자란 주인장은 제다업으로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고 했다. 적어도 차를 좋아하는 이 치고 악한 사람은 없었다고. 거대한 사업장보다 30년이라는 아버지의 시간을 진하게 우린 차만큼이나 아들이 이어가고 있는 듯한 지리산 자락의 풍경이었다.

그렇게 차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땅의 기운을 먹고 자라는 차나무는 어디에서 자랐는지에 따라 그 맛의 깊이에 차이가 있다고 했다. 마시는 차에 대한 대화였지만 결국 우리는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한 사실은 차밭이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Globally Important Agricultural Heritage Systems)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농업 방식이 드러난 경관을 보존하고자 세계중요농업유산을 지정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하여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하는 문화의 가치를 이야기 나누듯 계속해서 전해지는 농업방식이 축적된 땅의 모양새가 우리의 보존 대상이 되는 것이다.

차나무가 쥐똥나무처럼 사람 키를 넘지 않는 나무가 아니라, 차 수확을 위해 적당한 높이에서 다듬어주어야 하는 까닭에 적당한 높이에서 계속 다듬어졌다고 한다. 일하는 방식이 만든 경관. 일하는 손길이 빚은 땅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내가 인천이 아닌 하동에서 나고 자랐다면 제다인이 되어 있을까. 차담 중 문득 인천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일하며 만들어온 경관은 분명 이곳에도 있으리라. 바다와 육지, 하능리 만나는 이 땅의 기운을 받아 우리는 이곳에 무엇을 세우고 길러내었을까.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와 높은 하늘로 뻗은 고층 건물, 새로운 땅을 갈망하며 세운 신도시와 함께 인천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30년 동안 한 업을 이어나간 아버지와 서른 살이 되어 다시 고향에 돌아온 청년이 이곳 인천에서 함께 이어나갈 수 있는 일이 과연 존재할지는 의문이다.

새로운 것 가운데 우리가 지키고 이어 나갈 것을 알아차리는 일. 차밭이 펼쳐져 있고 지리산의 맑은 물이 흐르는 그들의 고향 그림과 대비하여, 인천 사람들이 만든, 혹은 만들어갈 경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유영이 서울대학교 건축도시이론연구실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