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준호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송준호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계묘년 해가 저물고 있다. 올해 태어난 아이들의 기대수명이 84세를 돌파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신년 칼럼을 시작해 격주로 독자와 만나다 보니 훌쩍 한 해가 지났다. 소년 시절 하루해는 금방 떨어졌지만 한 해는 백 년처럼 천천히 가더니, 초로에 접어드니 하루는 지루한데 한 해는 쏜살같이 흐른다. 인지학자들은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많이 겪기 때문에 시간을 더디게 느끼지만,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게 익숙해 세월이 쑥 지나간다 체감한다고 한다.

3년 동안 세상을 정지시킨 코로나 격리 의무가 지난 6월 해제되자 곧 50년 만의 폭염이 찾아왔다. 올여름 내내 응급실은 저나트륨혈증 고령 환자분들로 붐비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체내 염분이 부족해 생기는 이 질환은 일종의 더윗병으로 보통 한 해 몇 분 될까 말까 했지만 올여름에는 매일 두세 분이 응급실로 실려 왔다.

저나트륨혈증은 신장의 조절능력이 떨어지고, 못 드시거나 수액 또는 이뇨제를 사용하는 분들에게 잘 생긴다. 대부분 80 대 이상 고령층, 그중 만성질환이 있거나 요양시설에 계시는 분이 해당된다. 이 계층이 대폭 늘어났는데 그 위에 뜨거운 여름 기온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노령화와 지구온난화의 시작이다.

필자의 전문과인 신장내과는 원래 10~30대의 젊은 층과 50~60대에 이르는 장년층이 입원환자의 주류를 이루는 과였다. 그런데 코로나가 지나가면서 젊은 연령은 대폭 줄어들고, 주 연령층이 70~90대로 치솟아 올라갔다. 노령층이 감염에 취약해 생기는 팬데믹의 일시적 현상으로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이것이 대세 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 초고령화가 선반영 되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필자는 <사피엔솔로지>라는 인문서를 출간했는데, 그 내용이 인류의 기원과 미래를 다룬 것이라 주 독자층이 20~30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최대 구매층은 40~50대였고 60대의 구매가 20대와 비슷하였다. 웹툰 세대의 독서 취향도 관련이 있겠지만, 독서 시장 자체가 우리나라 인구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령화의 여파는 다른 산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기저귀 회사에서 소아용보다 성인용 기저귀의 비중이 더 커진 지 오래 이다. 성형 피부 미용 사업의 실제 주 고객층은 중장년과 노년층들이다. 4세대 걸 그룹들의 음악에는 586세대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90년대 레트로 뽕 비트가 심겨 있고, 보이 그룹은 노골적으로 공허한 중년 여심을 겨냥하고 있다. 그저 마케팅 차원에서 그런 사실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가장 두터운 층이 60대로 진입하고 있는 완벽한 역 항아리의 인구구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한민국이 곧 소멸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일으킨다.

지난 뜨거운 여름, 진료 현장은 스크루지 앞에 나타난 미래의 유령처럼 10년 후 대한민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기후 전문가들의 권고대로 걷고, 소비를 줄이고, 전기차로 바꾸고, 고기를 덜 먹어야 할 것 같다. 인구 전문가들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출산율을 올리기 위한 대책이 거의 없다고 고백한다. 출산율 만회가 불가능하고 노령화 사회가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건강 수명이라도 늘여 마지막까지 사회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의학자와 생명 과학자들이 매달려야 할 과제이다. 매년 연말이 되면 그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는 게 유행이다. 올해 진료 현장의 사자성어를 뽑으라면 '장장하일(長長夏日)'이다. 정말 길고 더운 여름이었다.

/송준호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