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인천은 서울과 함께 국내에서 처음으로 우편물을 접수·배달한 도시이다. 고종은 1883년 4월 우편 창설에 관한 칙령을 발표해 우정총국을 세웠다. 이어 한성~인천 간 우편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한성과 인천의 우전인(郵傳人)이라고 불리던 직원은 우편낭을 메고 경성까지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 매일 오전 9시 서로 우체사에서 동시에 출발했다. 두 우체사 중간 지점은 지금의 서울 구로구 오류동. 거기서 만나 우편물을 주고받고 오후 5시30분쯤 복귀했다고 알려진다.

인천우체사는 1898년 중구 내동에 있다가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한 통감부 설치 후 일본 측에 흡수됐다. 해방 후 인천우체국으로 명명한 건물은 1동 2층으로, 1923년 12월10일 완공됐다. 올해로 꼭 100년을 맞는 셈이다. 우편 업무를 목적으로 지은 행정 관청 치고는 아주 큰 규모였다. 그 무렵 유행하던 서양식과 일본식을 섞어 화강암 위에 벽돌을 쌓아올렸다. 2019년까지 사용하다 너무 낡다는 이유에서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한 상태다.

그런가 하면 국내 전보(電報) 역사에서도 인천이 앞서간다. 인천 전보의 효시는 고종 22년(1885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 정부는 청국과 조청전선조약을 체결한 후 인천을 기점으로 한성을 경유해 의주에 이르는 전선을 가설했다. 그리고 그 해 8월 한성과 제물포 간 첫 전보를 띄웠다고 한다. 그 때 청국은 인천이사부(영사관)에 전신국을 운영했으며, 전선을 천진으로까지 확장했다. 앞서 일본도 1884년 2월 말 부산과 나가사키 간 해저전선을 개통해 부산에 일본전신국을 설치하고 영업을 개시했다. 어디까지나 일본과 일본인을 위한 전보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인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족적을 남기고 있다. 서울 진입 '목구멍'에 위치한 지리적 관점에서도 그랬고, 서구 열강이 호시탐탐 노렸던 곳이 인천이었다. 1883년 개항 후 외국 문물이 인천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서구는 인천을 서울에 버금가는 도시로 인식했다. 우리나라와 외국 간 교역 대부분을 담당한 만큼, 통신 기능을 중요시한 일은 당연했다. 인천감리서에 전보·전화·우정 등을 확보한 주 이유이기도 하다.

그랬던 기능 중 전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됐다. 최첨단 세계에서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을 앞세워 설 자리를 잃었다. 따라서 KT는 '115전보 서비스'를 12월15일부터 끝낸다고 밝혔다. 국내 전보 도입 138년 만이다. 이미 2018년 4월8일 국제 전보 서비스는 종료된 상황이다. 진화하는 기술 앞엔 어쩔 수 없지만, 인천 통신 역사를 재조명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싶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