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마무리 공사 중인 시모도 연도교.

전화 등 통신수단이 미비했던 시절 기별을 전하기 위해 섬 주민에게 징검다리부터 나룻배를 거쳐 다리에 이르기까지 교통은 외부와 소통 및 삶과 직결된 사회기반시설이다. 북도면 3형제 섬의 우애를 더욱 두텁게 만들었던 연도교(連島橋), 즉 신도와 시도, 시도와 모도 사이의 교량 역사를 알아보자.

 

▶ 신도와 시도 연도교

신도, 시도 사이에 이동의 시작은 갯벌과 갯고랑에 징검다리를 놓고 물이 빠지면 걸었다. 주변에 위험 요소는 있었지만 필요할 때마다 사용했다. 다른 섬도 비슷하며, 사람 이외 특정한 동물도 정책적으로 이동했다. 이후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나룻배(전마선)이다.

1955년 이전까지 섬 이동은 신도1리 구로지 선착장부터 시도선착장까지 노를 저어 5~6인이 승선할 수 있는 작은 전마선(0.5M/T)을 이용하거나 하루에 2번 간조시 2시간씩 드러나는 징검다리를 이용해 왕래하였다. 나룻배의 뱃사공은 조영순, 허천실, 김창학씨였다. 뱃삯은 1970년대 100원이었고, 학생은 월 단위로 지불했는데 해광고등공민학교 그리고 북도중학교 학생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 후 주민의 불편함과 위험을 해소하기 위해 1955년 4월 착공하여 1957년 3월 준공한 잠수교를 만들어 밀물 때는 배로 통행했지만 오늘날 연도교의 초석이 됐던 것이다. 이 당시 면장은 천용택이었으며, 그와 친분이 있던 자유당 소속 장경근 국회의원의 협조로 다리를 놓게 됐다고 한다. 이후 1991년 7월 착공, 1992년 8월 준공하여 연도교(2차)를 보강했으나 부실한 점이 많아 2004년 1월 착공, 2005년 지금의 연도교(3차)를 준공했다. 그 준공을 기념하는 비석이 신·시도 입구의 소공원에 있다. 2004년 5월 착공했으며, 약 1년 7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2005년 12월 20일 준공했다. 교량 부분의 제원은 길이 240m, 두 섬의 산뿌리까지의 거리는 540m이며, 다만 너비는 1차 3m, 2차 5m, 3차 9.9m로 점차 넓어지고 있어 교통량의 증가에 맞춰 폭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다리가 완공되기까지 옹진군수는 북도면 출신의 민선군수 조건호였다.

 

▶ 시도와 모도 연도교

시도와 모도 역시 간조시는 걸어서 이동하고, 만조시는 노를 저어 나룻배를 이용했다. 뱃사공은 한중구, 한성윤씨였으며, 점차 나룻배 대신 동력선으로 대체되자 종선이 동력(객)선과 섬 사이를 왕래하며 통행을 도왔다. 이 당시 종선은 최병옥과 백갑진이 운영했으며, 김가진, 최병용, 박남영씨 등이 매표 활동 등 종선 사무를 함께했다. 선착장은 시도 노루메기 선착장에서 모도는 가장 가까운 바위나 갯벌을 이용했다.

교량은 신·시도 보다 약 40년 정도 뒤늦게 건설됐다. 1994년 10월20일부터 11월19일까지 연도교(1차) 공사를 시작으로 1995년 6월29일부터 8월9일까지 2차, 1997년 4월5일부터 8월9일까지 3차, 2001년5월3일 부터 2002년5월17일 까지 4차에 걸쳐 건설한 시모도 연도교는 잠수교였다. 그래서 간조나 조금 때만 통행이 가능하고 사리 때는 하루에 4시간을 제외하고는 통행할 수 없어 주민들의 불편이 뒤따르자 2002년 보강공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수구(水口)없이 석축으로 건설한 연도교로 인해 물길이 막혀 물고기가 잡히지 않자 옹진군청에서는 2019년 10월25일 갯벌 생태계 복원 및 연도교 해수 소통로 건설공사(5차)를 시작했으며, 현재는 마무리 공사 중이다. 총연장 길이는 431m이며, 교폭은 7.5m이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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