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창호 송암미술관 학예사.
▲ 연창호 검단선사박물관 학예사

일제 말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 대표적인 문화운동은 조선어학회와 <성서조선>이다. 성서조선 사건은 김교신이 쓴 '조와(弔蛙,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함)'라는 글이 조선 민족의 부활을 암시했다고 여겨 1942년 3월 <성서조선>을 강제 폐간(제158호)하고, 주요 인물들을 투옥한 사건이다.

1927년 7월에 6인의 동인지로 출발한 <성서조선>은 1930년대 총독부의 검열과 탄압에 시달렸다. 안으로는 신앙 동지들(정상훈, 류석동)의 이탈로 인해 김교신은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동인 중에서 끝까지 김교신 곁에 있던 이는 함석헌과 송두용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성서조선>의 발간을 계속하라고 격려해준 이는 10년 선배인 다석 유영모와 고향 친구 한림(韓林)이었다. 특히 한림은 김교신을 가장 잘 아는 동향 친구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기독교인과 마르크스주의자가 의기(意氣)로운 관계가 될 수 있을까?

한림과 김교신의 고향은 함흥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함흥에선 3월3일 장날에 일어났다. 함흥만세운동을 주도한 35명 중에 19살의 한림은 함흥고보 3년생으로 학생만세운동을 이끌었고 2심에서 90대의 태형 처분을 받았다. 함께 만세운동에 참가한 김교신은 주모자가 아니어서 풀려났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한림은 옥중에서 성서를 읽으며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때부터 김교신에게 전도한 것으로 보인다. 김교신은 예수를 사생아라고 조롱하였는데, 한림은 일본에 유학 가서도 계속 전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에 된 자가 먼저 된다더니, 한림은 이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다니며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김교신은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한림은 학창시절 늘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다. 1931년 4월 <삼천리> 잡지에 의하면, 당시 조선에서 유일하게 <자본론>을 원문으로 읽은 인물은 한림이었다. 책벌레였던 한림이 당시 유행한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은 당시로써는 있을 법한 일이었다. 조선에서 건너간 엘리트 유학생들이 거쳐 가는 코스가 사회주의였기 때문이다. 한림은 1928년 4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책임비서가 되었으나, 6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것이 ML(마르크스-레닌)당 사건이다. 그는 5년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에 사회주의 사상이 강했던 조선일보 함남지사장을 하며 함흥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한림과 김교신은 각별하였다. 1933년 9월6일 한림이 서대문 감옥을 나오던 날, 김교신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마중을 나갔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근무하던 양정고보로 등교한 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여관으로 찾아가 의기로운 벗을 만났다.

한림은 1940년 6월, 만일 기독교인들이 <성서조선>을 외면한다면 자신이라도 돕겠으니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라고 친구를 격려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념과 사상이 달라도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의기(意氣)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신자와 마르크스주의자인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고 흠모하는 외우(畏友)이자 지음(知音)이었다. 두 사람의 우정과 의리는 이념과 종교마저 뛰어 넘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려서부터 배운 유교적 소양과 선비적 기질, 조국과 동포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에 투철하고자 하는 진정성과 실천력을 갖고 있었다. 김교신 입장에서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거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절대자 앞에 서겠다면서 신의가 없는 기독교회나 신자보다 더 낫게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정성의 세계는 속알맹이의 세계, 즉 씨알이다. 씨알은 속임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세계는 빛을 발한다.

/연창호 검단선사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