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한때 도심에 사는 인천인들에게 송도는 소풍이나 콧바람을 쐬러 가는 정도였다. 인천에선 그만큼 한적한 곳이었다. 갯벌과 송도유원지 등으로 유명하던 송도엔 전국에서 휴양객이 즐겨 찾았다. 이렇다 할 놀이시설이 그닥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연수구가 생기면서 도시화로 치달았다. 지금이야 갯벌을 메워 송도국제도시를 만들었으니, 상전벽해란 말이 실감난다.

송도동 내 송도 갯벌은 2009년 12월 인천시에서 습지보호지역 제1호로 지정할 만큼 멸종위기 희귀종 철새들이 날아드는 곳이다. 2014년 7월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천연기념물인 저어새·검은머리갈매기·말똥가리 등 동아시아 철새의 번식지이자 이동 경로이다.

18세기 무렵 송도 갯벌의 행정 구역은 인천군 먼우금(遠又邇)·남촌·조동면이었다. 이 중 옥련·동춘·청학·연수동이 속한 먼우금면의 유래가 흥미롭다. 일대에 갯골이 많아 짧은 거리를 멀리 돌아가야 해 '멀고도 가깝다'라는 뜻에서 나왔다는 설, 문학산에서 뻗은 산세가 휘고 오므라진 꼴에서 착안해 '먼오금'으로 부른 데서 비롯했다는 설 등 다채롭다.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1936년 해안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계(契)를 묶어 송도어업조합을 설립했다. 주민들을 한데 모아 통제하려는 수단이었다. 이 조합에선 조개류를 주로 잡았고, 조수 차를 이용하거나 맨손으로 잡는 어업이 뒤를 따랐다고 한다. 해방 이후 정부에선 1957년부터 양식업 진흥을 추진함에 따라 송도 갯벌에도 양식장 붐이 일었다. 갯벌엔 질 좋은 조개와 꽃게 등이 지천이었고, 어민들은 외지인에게 가무락탕과 꽃게탕을 팔면서 번창일로를 달렸다. 고교 졸업 후 친구들과 송도에 놀러가 조개탕 등을 즐겼던 기억이 아련하다.

이렇게 송도 갯벌을 터전으로 삼는 내륙에서 막차를 탄 도시어부들이 되살아났다. 연수구가 최근 송도·척전어촌계의 한정어업면허 연장 신청을 승인했기 때문이다. 이들 어촌계는 앞으로 3년간 지금처럼 송도 앞바다를 휘젖고 다닐 수 있게 됐다. 황금어장으로 불리던 송도 갯벌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송도·척전·동막·고잔 4개 어촌계 1300여명이 활동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가속화한 매립과 개발 영향으로 동막·고잔어촌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남은 송도·척전어촌계원은 현재 260여명에 이른다.

이들 어촌계원은 매립과 개발의 걸림돌이 결코 아니다. 생활의 활력을 불어넣는 이들에게 어업 면허 연장은 생명의 끈과도 같다. 어쩌면 당연하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삶의 희망을 꺾지 말아라. 어촌계원들이 꾸준히 삶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행정 당국의 배려가 절실하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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