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도 인천 첫 구단, 창작 무대로 부활
일제 저항 스포츠 영웅들 '질곡' 소개
극단 십년후, 트라이보울서 3일 무대
▲ 최초 야구단 한용단 모습.  /사진제공=인천시
▲ 최초 야구단 한용단 모습. /사진제공=인천시

“인천 춘계 야구대회 제3회전과 결승전은 예정대로 이십일일 상오 아홉시부터 시작된 바 정각 전부터 앞을 다투어 모여든 관중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오 네 시 반부터 한용단의 선공으로 결승전이 시작되니 장내를 뒤집는 듯한 박수 소리와 한용군의 여룡여호 용기는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집을 기세였는데…”

우리나라 야구사와 함께 한 '야도 인천'. 개항과 더불어 인천에 들어온 야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이 중심에 '한용단'이 있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 고교야구와 프로야구에 이르기까지 야도 인천의 시작을 열었던 한용단이 창작 뮤지컬로 부활했다.

▲ (왼쪽부터) 상훈 역 김도하, 다나카 역 김대환, 코치 역 박석용, 수연 역 이미정.<br>
▲ (왼쪽부터) 상훈 역 김도하, 다나카 역 김대환, 코치 역 박석용, 수연 역 이미정.

극단 십년후는 '풀카운트'를 11월3일 오후7시30분 트라이보울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인천의 야구는 최초의 야구단 한용단 창단에서 출발했다. 1919년 11월13일 순수 한국인으로 구성된 청년체육단체였다. 당시 단장을 맡았던 곽상훈을 필두로 경인철도 통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다. 야구 복장이나 용품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해 시작은 미약했으나 이들의 열정적인 시합 장면은 억압된 민중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한용단은 인천부민들의 자랑이자 희망이 됐다.

그러나 1922년 전인천야구대회에서 한용단이 동지회와 결승 경기 중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우승을 놓치게 된다. 격분한 인천시민들과 충돌사고가 발생하면서 한용단은 해체라는 불운을 겪게 됐다.

이번 뮤지컬에서는 이 한용단의 창단부터 해체까지 걸어온 질곡을 소개한다. 스포츠로 일제에 저항하고 인천시민들의 영웅이었던 한용단의 역사적 의미를 훑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