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철민 작가·칼럼니스트.
▲ 박철민 작가∙칼럼니스트

19세기, 우리가 근세를 함몰하여 조선소중화의 자존심마저 놓칠 때,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이, 천손 선민사상과 유럽인을 하나로 묶고, 열등 짐승들인 아시안을 베고 자른 패러다임은, 비록 그들이 아세안(ASEAN)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동남아와 신뢰를 구축한다고 해서 진정 용서가 되는 것일까?

난징과 조선인 의용, 종군위안부, 독도, 다오위다오 등으로 아세안의 주축국들인 중국과 한국이 노려보는데, 그 차갑고 미묘한 공기는 어찌하는가? 프랑스와 독일의 전후의 관계가 상호커뮤니케이션 에너지로 승화되어 EU 27개국이 됐고, 친미, 동아시아공동체의 빈말로, 겉으로만 관계개선을 외치는 일본이 있다고 해서 아시아가 아니 동양 삼국이 정치적 통합을 이룰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 염무웅이 고은의 서사시 <만인보(萬人譜)>를 두고 '자기완결성을 획득하고, 거대한 덩어리로 응축된 역사의 성층권을 형성한 대서사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고향과 전쟁. 혁명과 항쟁, 그리고 유신과 불교에 대한 페르소나의 진술이 각자 하나의 완성된 서사적 형식을 빌린 서정시편 수천 편의 모음으로, 지정학 된 서술이므로 위대하다고 했다'고 해서, 노벨문학상이 노르웨이로부터 날아오는가?

메이지유신 이후 글로벌리즘이 장착된 오늘까지 일본은 여전히 강국이다.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특유의 선민을 등에 짊어진 가미카제로. 그런 일본에 유럽인들은 아낌없이 노벨을 주었다. 우리가 노벨상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자위하는 평화상 하나 모셔온 사이에 수십 개나. 미군기지는 우리나 일본이나 필리핀이나 똑같은데, 그 존재 형식은 왜 그리 다를까?

왜소한 청년이 전후 흔들리는 독일로 건너가 플럭서스(흐름)라는 신 아방가르드 운동을 했고, 유럽의 중산층들의 교양전유물이었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박살 내고 질질 끌고 다니며 전혀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였고, 비디오아트로 20세기 예술을 평정하며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안기자, 유럽인들은 열광했고 그에게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라는 명성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다름의 미학'은 단지 그것뿐! 문화와 정치적인 궁핍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왜일까? 우리에게도 일본의 천손 선민을 닮은 환인과 환웅 그리고 단군의 배달이 있는데, 게다가 환인은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구현하는데 말이다. 19세기 일본이 열광한 유럽을 우리는 여전히 열광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인가?

노벨상이 만약 죽은 자에게도 수여된다면 우장춘이나 이휘소, 그리고 박경리나 백남준에게도 갈 수 있을까? 이 물음에는 이미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담당기자가 오래전에 대답했다.

“지송파크는 흡사 로버트 같다. 그는 도대체 말이 없다. 에인트호번에서도, 맨체스터에서 뜰 때도, 다시 홀랜드에 돌아가서도. 한국인들은 유럽 사람들이 아직 전자레인지와 일벌레로만 자신들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유럽인들은 지송파크를 그저 단순한 축구 로봇으로만 안다. 또한, 유럽인들이 그를 아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대통령보다 유명한 한국인이라는 것, 단지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일 것이다.”

여기 우리의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가 동양 평화론을 시적으로 표현한 '장부가'에서 이미, 괜찮은 나라임에도 글로벌레이전하지 못해 안달하는, 노벨이 인정하지 않아도 별 상관없어야 하는, 주권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내고 있었는데,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우리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연히 한번 감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연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 같은 도적 이등박문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어찌 이에 이를 줄을 시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어느 신문에 실린 노벨상 바라기 기사를 보고 이렇게 쓰고 있는 시간, 비현실적인 정치의 희비극을 꿰매고 있다.

/박철민 작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