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교육운동 맥 이어 경제 자립 주춧돌 놓다

6·25전쟁으로 생산 기반 시설 파괴
美 대한 경제 원조 구호·복구에 집중

日 재건 유용되는데 하와이 교민 반발
모국 공업 고등 교육기관 설립 목소리

1953년 2월8일 기성위 발기회 개최
6월4일 이승만 대통령 대학 설립 담화

11월15일 이민 50주년 기념식 축사
한인 민족운동사 인하공대 연결 확인
▲ 이승만(왼쪽 네 번째 흰색 양복) 박사가 설립한 와이알라에 알리이올라니(Waialae Aliiolani) 스쿨 시대(1918~1921)의 한인기독학원(Korean Christian Institute, KCI). 건물 1층은 교회, 2층은 교실, 3층은 여학생 기숙사로 사용됐다. /사진=크리스천 헤럴드 '태평양을 가로지른 무지개'
▲ 이승만(왼쪽 네 번째 흰색 양복) 박사가 설립한 와이알라에 알리이올라니(Waialae Aliiolani) 스쿨 시대(1918~1921)의 한인기독학원(Korean Christian Institute, KCI). 건물 1층은 교회, 2층은 교실, 3층은 여학생 기숙사로 사용됐다. /사진=크리스천 헤럴드 '태평양을 가로지른 무지개'

1952년 8월5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직선제에 의해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남한은 이미 6·25전쟁으로 경제 기반은 송두리째 파괴되어 있었고, 미국의 대한 경제 원조는 구호 사업과 전재 복구에 치우쳐 자립자족 경제를 위한 생산 기반 시설을 확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절실히 요구되던 국가의 당면한 정책은 과학기술 교육의 실천과 과학 기술자 양성을 위한 공업 생산 교육이었다. 공업 대학을 설립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구상은 1952년 12월 중순경 피란지 부산에서 김법린 문교부 장관에게 '인천'에 M.I.T와 같은 최고 수준의 '공과대학'의 설치를 지시하면서 표면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 1919년 4월2일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이 임대하여 사용하던 알리이올라니공립학교에서 개최된 3·1운동 대회. /사진제공=한국이민사박물관
▲ 1919년 4월2일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이 임대하여 사용하던 알리이올라니공립학교에서 개최된 3·1운동 대회. /사진제공=한국이민사박물관

그동안 이 대통령의 기술 교육과 공과대학 설립 의지는 이미 여러 차례 강조됐었다. 대통령 담화문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원조자금을 기계구입에 쓰자(1951년 9월18일)', '기술자는 1주일 내에 보고하라(1952년 10월27일)', '외국물자는 쓰지 말고 생산에 노력하라(1952년 11월1일)' 등은 당시 기술과 생산의 필요가 얼마나 긴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후일 인하공대 개교 기념식 치사에서 나타난 “이 학교에서는 무슨 철학 박사, 심학 박사를 내자는 것이 아니고 기계학을 배워야 한다”라는 목적과도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재 하와이 교포들은 그들의 이주 50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조국의 자주독립과 부강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공업 고등 교육기관의 설립을 이미 대통령에게 제의한 바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미국과 UN의 원조 자금이 대부분 구호를 위한 소비재가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는 데에 크게 반발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의 원조 자금으로 일본 경제의 이익을 위해 일본의 재건에 유용되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공과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내내 피억압 민족인 조선인에게는 고등 교육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차별 의식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과학 기술 교육에 있어서는 한국인은 하급 교육, 일본인은 고등 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고정화되다시피 했다. 식민지 체제가 한국 과학 기술에서 빚어낸 가장 심각한 비극과 불행은 바로 사회적 당면 과제와 과학기술 진흥 간의 괴리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과학기술의 사회적 위상이 극도로 낮아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 민족에게 당면한 과제로서 민족 독립, 실력 양성, 차별 철폐 등과 같은 절박한 '정신적' 문제들이 우선이다 보니 과학 기술은 뒷전으로 밀려 있었던 것이다.

▲ 1923년 7월13일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건축 모금을 위해 민찬기 단장, 김노디 여성교육가와 한인 2세 학생 등 하와이학생고국방문단이 인천을 방문해 내리교회 예배당에서 기념촬영했다. /사진제공=한국이민사박물관
▲ 1923년 7월13일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건축 모금을 위해 민찬기 단장, 김노디 여성교육가와 한인 2세 학생 등 하와이학생고국방문단이 인천을 방문해 내리교회 예배당에서 기념촬영했다. /사진제공=한국이민사박물관

1953년 2월8일 문교부는 '인하'공과대학 설립기성위원회 '발기회'를 개최하고 <발기취지서>를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공과 대학 설립에 대한 초안이 대통령의 지시 후 2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의 의지였기도 하지만 이미 하와이 동포들과도 협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발기취지서의 내용은, 생산이 결핍된 한국에서는 생산을 병행하는 교육이 절대로 필요함을 전제로 하여 ① 하와이 동포들은 고국을 떠났던 50주년 기념사업으로서 그 옛날 최후의 발자취를 남긴 인천에 공과대학을 설립한다. ② 한국이 절실히 요청되는 기계공학과, 조선공학과, 광산공학과를 (우선)설치한다. ③ 국립이나 공립보다도 하와이 동포와 국내 동포의 합작으로 성립된 (사립)재단으로 설립한다. ④ 학교 이름을 하와이 노동 이민자들의 출발지(인천)와 목적지(하와이)의 첫 음을 따 '인하'로 한다. ⑤ 나아가서 남북통일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국민들로부터 최대의 관심과 협조를 촉구한다는 것이다.

이어 1953년 6월4일의 대통령 담화에서는 “인하공과대학 설립은 자신이 처음부터 '경영'하여 국무회의 의결과 인천시장의 찬성으로 시작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인천시는 학교 부지 13만평을 제공하게 됐다.

▲ 1953년 11월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 팸플릿 '하와이 한인동포의 황금 희년을 맞이하여' 표지. /사진제공=인하대총동창회
▲ 1953년 11월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 팸플릿 '하와이 한인동포의 황금 희년을 맞이하여' 표지. /사진제공=인하대총동창회

1953년은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을 준비하는 해였을 뿐 아니라, 미국의 새로운 이민법이 통과됨에 따라 하와이 1세대 한인들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던 해로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기념식은 뒤늦게 1953년 11월15일 거행됐다. 당시 함태영 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을 대신하여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한인 이민 5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당시 제작한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 팸플릿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축사, 양유찬 주미 대사의 대한민국 소개, 하와이 주지사와 하와이주의회의 공식 선언문, 한인 이민 1세들에 대한 회고, 하와이 이민 관련 사진들(1953년 당시 구호품 전달 활동 포함)이 게재됐다.

▲ 1953년 11월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 팸플릿 '하와이 한인동포의 황금 희년을 맞이하여'의 이승만 대통령 축사. /사진제공=인하대총동창회
▲ 1953년 11월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 팸플릿 '하와이 한인동포의 황금 희년을 맞이하여'의 이승만 대통령 축사. /사진제공=인하대총동창회

당일 행사에는 약 1000명의 한인 이민자들이 참여하였는데 이날 부통령이 대독한 기념 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그간의 감회와 인하공과대학 설립에 대한 경과가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다. 이어 한인기독학원 측의 <1903년 최초의 한국인 이민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축사도 있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① 한인기독학원은… 이승만 박사가 설립한 것으로 ② 본 학원이 1947년 발전적 해체를 하게 됨에 따라 학원 부지를 매각한 대금을 인하공과대학 설립에 기본금으로 희사한다고 했다. 이것은 후일 '재 하와이 인하후원회'를 발족하여 장학 사업이 출범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됐다.

하와이 이민 50년을 기념한다는 것은, 온갖 생활상의 고통 속에서도 민족운동에 물질적, 정신적으로 헌신한 애국동포, 애국지사들의 이야기였고, 한편으로는 이승만 대통령 자신의 하와이에서의 교육운동, 민족운동을 기념한다는 의미를 내포하였던 것이며, 그 결실이 곧 인하대학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다.

8·15 민족 해방과 6·25전쟁의 발발로 과학 기술을 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업 교육 시설의 부재라는 한계에 직면하게 됐다. 인천에 공과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의지는 경인공업지대를 배후로 하는 남한 제일의 공업지대로서의 지리적 이점과 하와이 이민 및 해외 민족운동의 계승이라는 양면을 모두 충족한 부분이다. 그리고 의무적 다수의 국립대보다 '특수 목적' 대학으로서 '공과' 대학의 육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의 보호 하에 국책적 기능을 수행하면서 파격적 지원이 가능했던 '사립' 대학으로 출범한 것이다.

인하공과대학은 1950년대 초반, 당시 국가 재건이라는 '역사적 사명'과 '시대적 소명'에 따라 국가 원수의 결단에 의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하와이 이민이 출발한 인천에 숙명처럼 자리 잡게 됐다.

 


 

1953년 6월4일 이승만 대통령 담화 요지 '인하대학의 설립에 관하여'

인하대학은 인천과 '하와이' 사이에 한국 이민선이 처음으로 인천에서 '하와이'에 간 50년 기념을 목적하고 대학을 인천 항구 내에 건설하기로 결정되여서 이 대학 계획이 시작된 것은 50년 전에 한국 이민이 인천에서 '하와이'에 들어가서 미국 대륙으로 연락되여 한국 독립운동을 계속 진행하여 온 것을 기념하며 따라서 그 이민들의 자녀들이 '하와이'와 대륙 각처에 경제와 사회 다방면으로 유력한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을 기념하며 이 앞으로 한국과 '하와이' 사이에 연결과 우의를 돈독히 하야 그리로 달하여 미주까지 연결하는 '진검다리'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인천 '하와이'의 물질과 성심을 합하야 인하대학을 만들고 대학의 主旨는 공과대학을 만들어서 마치 미국의 MIT와 같은 미국에 제일 유명한 공과대학을 의미한 것이니 우리 사람들이 자래(自來)로 문과나 철학 등으로 숭고(崇高)하든 의도를 많이 변동해서 이 물질 시대에 기계학과 공업 발전의 물질 세력을 다른 나라와 경쟁하자는 목적을 가진 것이니 (중략)

이 대학교를 세우는데 대하여서는 목전에 급하기도 하고 장원(長遠)한 계획에도 제일 긴요함으로 내년 4월 이내에 개학할 계획으로 시작하는데 인천시장이 협의하야 상당한 기지를 내놓았으며 인천시에서 표석(標石)을 박어서 누구나 갈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정부에서는 위선 백만불을 예산에서 지변하였는데 제일 근본으로 토대삼는 것은 '하와이'에서 15만불을 모아논 것이 있어서 이것을 먼저 시작할 것인데 이 돈은 '하와이' 농민들이 한인 청년들의 교육을 위하여 학교를 세워서 지낸지 30년가량 된 것인데 우리 청년들은 상당한 미국 교육기관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지금은 필요가 없으니 기지를 팔아서 거기서 난 재정이 이것으로 시작을 마련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 장차 외국친구들도 도울 생각들이 있는 것을 아는 터인 바 우리가 잘한 연후에 외국 원조를 받을 수도 있겠으니 금액 15만불은 정하야 놓고 시작할 것인데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연조(捐助)가 310만1400환이 되였으며 특별히 교육가들의 자원으로 위원회를 정하여 공포 선전하야 동포들이 각각 자원으로 상당한 연조를 모아서 한모퉁이를 돕고자 하는 것임에 누구나 남의 권면에 끌리거나 정부 세력 관계로 하는 것은 없게 하고 민중이 다 이 의도를 찬성하는 마음으로 얼마큼 기부하야 우리의 성심을 표할 것인데 적은 액이라도 많은 사람이 연조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 위원들이 따로 공포도 있겠지만 이것은 내가 자초경영(自初經營)하여 국무회의 결의와 인천시장의 찬성으로 이와 같이 공포하니 모든 유의(有意)한 동포들은 여기에 성심을 기우려서 힘에 적당한 대로 다소 연조하야 속히 성공케 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런 큰 사업을 충분히 성공할랴면 우리는 지금 전쟁의 환경에 있으므로 우리의 힘만으로는 원만한 효과를 얻기 어려움으로 친구의 힘을 얻으려면 우리가 힘을 다하여 성의를 다하는 것이 친구의 도움을 얻게 되는 원칙임으로 우리가 오늘 어려운 생각만을 하느니보다 앞에 진전을 생각하는 것이 또한 지혜로운 일임으로 인하대학의 대성공을 위하야 우리 모든 남녀 동포가 정성을 기우리기 바란다.

▲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인하대학교 총동창회·인천일보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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