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미국에서 발생한 경제대공황은 전 세계적으로 먹고사는 문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난국 타개의 하나로 1931년 관동군이 만주 일대를 점령하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수립하고, 조선에 대해서는 민족말살정책을 통해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화로 삼았다. 마침내 1937년 베이징 근처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인적 물적 자원 수탈을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했다. 곧바로 일본식 이름(創氏改名)을 쓰도록 강요하며, 거부하는 사람에겐 불이익과 함께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낙인을 찍었다. 나아가 1941년에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인 징용, 징병, 공출 등을 자행했던 시기로서 이 1930~40년대 신도교회와 교인은 어떤 활동을 이어갔을까?
▶ 신도교회와 교인의 활동(1930~1940년대)
1930년대의 종교 활동은 1934년 고남리교회에서 금주단연회(禁酒斷煙會)가 조직되어 경제적 저항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사실 금주단연운동은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열기 속에서 민족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민족 기업을 설립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민족 자본이 필요하게 되면서 추진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종교계는 이 운동이 종교 윤리와 부합되어 본격적인 운동을 전개하며, 동아일보에는 “1933년에는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등 전국의 기독교 각 기관이 총동원되어 금주 단연의 선전기를 들고 10여만 매의 전단을 뿌리며 금주가(禁酒歌, 감리교인 임배세가 작사)를 부르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한편, 고남리교회는 다음 해인 1934년 1월에 이 운동을 실천하고 있는데, “신도 고남리교회에서는 동리의 청소년이 지나간 (1934년) 1월16일에 금주단연회를 조직게 하였다는데 앞으로 과거에 소비한 술값과 담뱃값만큼을 저축하였다가 상당한 자금이 되면 부업기관을 시설하리라 한다. 피임된 임원은 회장 전창실, 부회장 한정옥, 서기 김영록, 간사 유순창, 김문회, 유사원, 박흥록, 천희규, 천대규, 박근산, 전성실, 총무 윤효진, 고문 이치명”이었다.
도서 지역에서의 작은 실천이 1920년대 이후 애국계몽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항일운동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당시 이천국, 이치명, 정등운, 조용구 목회자들의 활동도 큰 힘이 됐다. 특히, 이치명의 역할은 이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35년 이치명 전도사가 사망한 후 1945년 해방 직전까지 고남교회에 상주하는 목회자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40년대는 일제가 일본식 성명 강요를 비롯하여 징병, 징용, 공출 등 민족말살정책으로 남자들은 외지로 나가 직업을 찾거나 강제 동원, 신사참배, 그리고 교회의 경우 성경 읽기, 찬송 부르기, 예배 시간도 통제받던 시기여서 교회의 경우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이 시기 가장 많은 수고를 한 사람은 김영순 권사였다. 그는 만 16세이던 1933년 10월10일 고남리교회의 교인이 되었고, 20대 중반이던 1940년대 극히 어려웠던 일제 탄압 속에서 교인을 방문하여 병자를 위한 기도, 마을의 관혼상제에 협조, 노인 존경을 실천하고 아래 사람들을 사랑하니 그녀를 따르는 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수시로 경찰의 조사를 받아 교회 신도에게 하는 설교 내용, 주일학교 교재, 궁성 요배, 황국신민 서사 암송 후 예배, 출애굽기 읽지 말기, 교회 종 공출 등등 검열과 탄압 속에서도 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를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고남리교회는 복음에 기초해 있으면서 지역사회와 주민에게 끊임없이 다가서며 펼친 신앙 활동이 부활과 부흥의 비결이었다.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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