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영 경제부장.
▲ 이주영 정치부장

 

긴소매를 꺼냈다. 가을 노래 몇곡을 흥얼거린다.

가사는 몰라도, 입속을 맴도는 영화 속 중국 노래 3곡. 해가 바뀌어도 변함없다.

2002년 작 '무간도' 첫 장면, 날것의 양조위와 가공된 유덕화가 레코드 가게 소파에 앉아 몇 소절을 함께 듣는다. 스피커에서 울린 그 곡, 채금(蔡琴)이 부른 '피유망적시광(被遺忘的時光, 잊힌 세월)'이다. 늘 여름(홍콩도 계절이 바뀐다)인 곳에서 끝 여름처럼 둘의 운명을 예견한 듯 구슬프다. 등려군(鄧麗君)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을 대표하다)'도 내 가을 노래다. 중국으로의 반환 직전, 홍콩은 어수선하다. 1997년 3월 개봉한 '첨밀밀'에서는 촌스런 여명과 촌티를 벗으려 애쓰는 장만옥을 잇는 가교로 등려군 노래를 썼다. 중국인이지만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 엑소더스 혹은 디아스포라처럼 타국으로 흘러갔지만, 그곳 달빛도 고향과 같다. 달빛은 홍콩인의 마음을 대신한다. 수년이 흘러 우연히 만난 둘, 달빛처럼 한결같다. 달은 가을과 어울린다.

만추(晚秋)는 가을이다. 현빈과 탕웨이가 주연한 2011년 작 만추는 미국 북부의 메마름이 담겨 있다. 불안정한 현빈과 삶이 깨진 탕웨이가 우연히 만나 서로에 기대지만 끝은 만추와 같다. 만추는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이기에, 둘 운명 또한 시작도 없이 끝이 났다. 탕웨이의 기다림은 무의미하지만, 연(緣)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마음이 쓰인다.

가을이 익어간다. 세상은 가을을 뺏긴 듯 겨울처럼 곧추섰다.

작금에 '봄은 오고야 말리라'란 옛 시인의 다짐은 까마득하다. 장기전으로 치달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다툼은 수만 리 떨어진 우리까지 겁을 잔뜩 먹게 한다. 침략자 러시아와 하마스는 단순·괴팍·잔인하다. 러시아와 하마스(하마스는 나라가 아닌 팔레스타인의 한 정당이자 테러집단이다)는 자국민의 이익을 우선하지 않는다. 전쟁을 정치의 술수, 정권의 유지로 활용했기에 국민의 희생에 눈 하나 깜짝 않는다. 애초부터 그들에게 국민이란 단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전쟁이 주변국으로 확대돼 중동 전체를 화약고로 만들지 않길 바랄 뿐이다. 늘 여름인 중동에, 전쟁 같은 겨울이 찾아왔건만 봄소식은 없다.

민주주의 성지인 미국조차 정쟁의 한겨울을 걷고 있다.

지난 4일 미국 서열 3위 하원의장이던 공화당의 케빈 매카시가 미 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해임됐다. 셧다운(연방정부 예산 정지) 위기에 매카시가 민주당과 야합을 했다는 이유로, 공화당 의원들의 손에 끌려 내려왔다. 임시 예산안을 함께 한 민주당도 그의 낙마에 일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 명분을 깨뜨리려는 공화당에 맞섰다는 게 그의 해임 이유지만, 내년 미 대선에 앞선 트럼프 전 대통령과 바이든 현 대통령 간 알력다툼이었다. “미국을 미국답게”라는 구호 속에 국민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미국은 '민주당의 미국이요, 공화당의 미국'이다. 그래도 대선 후 잠깐의 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끝났다. 뻔한 결과였다. 거대 정당 2곳 중 잘한 1곳을 택한 게 아니었다. 이미 우리 정치에 국민은 실종됐고, 정략만이 판친다. 국민을 위해서란 포장에 더는 현혹될 국민은 없다. 내년 4월 총선까지 6개월 남짓 시간이 남았다. '국민'이 희미해진 국민의힘에게는 환골탈태가, '집단'화된 민주당은 분골쇄신의 기회이다. 더 쪼그라진 소수·약자 목소리에 더 귀기울여야 한다. 겨울 같은 정치혐오가, 봄에 맞은 총선 후 좀 나아지려나.

그렇게 가을 한복판에서 봄을 기다린다.

/이주영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