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꼭 100년 전인 1923년 9월1일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진도 7.9의 강진이 일본의 도쿄 등 간토(關東) 지방 일대를 강타했다. 곳곳이 무너지고 불타는 가운데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만 14만여명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안팎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내각의 혼란은 물론이고 일본 내 반정부세력의 위세도 갈수록 큰 부담이었다. 게다가 조선과 중국, 만주 등에서의 항일투쟁과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당연히 일본의 사회 분위기도 암울하고 불안하던 터였다. 간토 대지진 직후 취임한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 내각은 뭔가 탈출구가 필요했다. 이른바 '희생양 찾기'에 나선 것이다.

식민지 백성 재일 조선인은 가장 손쉬운 표적이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거나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급속히 확산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의 경찰과 군대, 자경단은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찾아내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조선인을 찾아내기 위해 '15엔 50전(쥬우고엔 고쥬센)'을 발음해 보라며 집단 광기를 보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그해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조선인 피살자 수를 6661명이라고 보도했다. 차마 말과 글로 다할 수 없는 끔찍한 대학살이었다.

그로부터 100년, 일본 정부는 아직도 정확한 진상을 밝히거나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도 관련 내용이 축소되거나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2023년도 일본 검정교과서 8종에는 간토 대학살 가해자에 군·경이 빠졌거나, 조선인 희생자 숫자도 적시하지 않은 곳이 적지 않다고 한다. 물론 해당 지역 도쿄도의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지사는 추도문조차 보내지 않고 있다. 100년 전의 끔찍한 범죄 사실을 부인하거나 지워버리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이런 현실을 과연 일본 국민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싶다.

간토 대학살의 주범으로 당시 계엄령을 발동한 일본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와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츠시(赤池濃)가 자주 거론된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식민지 조선과 인연이 많다. 미즈노는 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아카이케는 그 밑의 경무국장으로 있었다. 이들은 4년 뒤 일본의 치안책임을 맡았고 조선인 간토 대학살 주범이 된 것이다. 조선에서 경험했던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이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서울역 광장에는 강우규 의사 동상이 당당하게 서 있다. 1919년 9월 2일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일행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영웅이다. 그때 미즈노도 신임 정무총감으로 함께 있었다.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확인시킨 의거였다. 혹여 서울역 앞을 지나갈 땐 강우규 의사의 동상에 눈길이라도 줬으면 좋겠다. 외롭지 않게.

▲ 박상병 시사평론가
▲ 박상병 시사평론가

/박상병 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