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페이 시티컵 복싱대회에 심판으로 참가한 박형옥.

“연어의 회귀본능 같은 뭐 그런 거 아니었을까요...오랫동안 떠나있던 고향, 복싱계로 돌아와 옛 동료들과 교류하는 이 순간들이 행복합니다.”

박형옥(59)은 1980년대 한국 아마추어 복싱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인천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복서다.

인천 서흥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동인천중학교에 진학, 등·하굣길을 오가며 봤던 복싱체육관을 보고 점차 흥미가 생겨 2학년이 되던 해인 1979년 2월 본격적으로 권투를 시작했다.

적성에 맞았는지 그는 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복싱을 시작한지 1년 만인 1980년(중3) 4월 전국대회(제1회 대한중고복싱협회장배)에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 타이틀까지 거머쥐며 미래 아시아 챔피언의 등장을 예고했다.

더 놀랄만한 것은 그가 제1회 대회를 제패한 뒤 2년 터울 동생들인 박형일(둘째)과 박형대(막내)가 잇따라 3회, 5회 대회에서 똑같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최우수선수까지 차지했다는 것이다.

당시 여러 신문에서 다룰 만큼 이 일은 큰 화제였다.

▲ 1982년 박형옥 바로 아래 동생 박형일이 제3회 대한중고복싱협회장배에서 우승한 후 삼형제 사연을 보도한 신문. 사진제공=박형옥

그는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하던 1981년, 광성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국제무대에서도 통하는 최고 수준의 복서로 성장한다.

이제 독자적으로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된 인천직할시의 복싱 대표로 활약함과 동시에 실력도 일취월장, 고교생 신분으로 태극마크를 달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3학년 때인 1983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11회 아시아복싱선수권에서 감격의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경희대학교로 진학한 박영옥은 여세를 몰아 1984년 LA올림픽에도 출전한다.

하지만 여기서 선수 생활 중 가장 아팠던 사건을 겪는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처음 도입된 이른바 슈퍼저지 시스템(첫 판정이 5대 1이나 4대 1이 아닌 3대 2일 경우, 첫 판정을 한 5명의 심판이 아닌, 별도의 심판 5명이 다시 판정해 이를 최종 결과로 인정)의 희생양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페더급 8강전에서 3대 2로 승리했지만, 슈퍼저지 시스템 판정에서 1대 4로 뒤집혀 패배했다.

졸지에 올림픽 동메달을 눈앞에서 날려버린 그는 통한의 눈물을 애써 삼켜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절치부심 끝에 다시 대표 선발전을 통과, 1986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 서울 아시안게임에 참가해 금메달을 획득하며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인천 출신 또는 소속 복서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후 무려 38년 만인 2014년, 인천 대회에서 신종훈(당시 인천시청)이 정말 오랜만에 금맥을 이었고, 4년 뒤인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에서는 오연지(당시 인천시청)가 정상에 서며 인천 복싱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89년까지 복싱 국가대표로 활약한 박형옥은 실업 선수 생활을 하던 여주시청(1988∼1992)에서 은퇴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는 천재복서 고 허영모(2018년 작고)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투정을 부리고 쉽게 토라지는 좁은 성품을 지닌 자신을 감싸주고 관대하게 대해준 고마운 복서’라는 이유로 ‘가장 좋아하는 친구’로 꼽을 만큼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인천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지도자 준비도 했고, 잠깐 코치 생활을 하며 지내던 그는 1993년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 복싱계를 아주 떠났다.

서울의 한 신문사 영업직을 거쳐 1996년 국민체육진흥공단 경륜사업본부에 입사하면서 경륜 심판으로 변신한 그는 2011년 창원경륜공단(현 창원레포츠파크)로 이직했다.

그리고 동시에 대한복싱협회 공인 심판 자격증을 따며 복싱과 다시 인연을 맺을 준비를 했다.

그러고도 한동안은 직장생활에만 전념하다 마음을 바꿔 최근 4∼5년 전부터 각종 복싱 대회에서 심판으로 참가하고 있다.

복싱협회에서 위촉을 받으면 직장에 휴가를 내고 기꺼이 참가하며 ‘심판’으로서 제2의 복싱 인생을 즐기고 있다.

“떠난 후 복싱을 오랫동안 잊고 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심판자격증을 땄고, 그렇게 고향으로 왔다. 지금은 이렇게 옛 동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삶이 좋다. 요즘 대한민국 복싱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늘 후배들을 응원하고 있다.”

/타이페이=글·사진 이종만 기자 male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