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초기에 가난한 이웃의 세금을 대납해주고, 마을에 학교를 세워준 인물이 있다. 주민들이 그의 선행을 기려 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해방 후 70년이 지나 이 인물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 이 경우 비석 옆에 해당 인물에게 친일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뒤늦게라도 세우는 게 자주독립국가의 당연하고 당당한 역사인식이자 실천방식이다. 그 인물의 선행과 기여가 친일행적과 얽혀 들어간 비극을 후대가 되새기게 해 주어야 한다. 전자만 강조하는 건 역사왜곡이다.

경기도 지자체에서 실제 있었던 사례다. 경기도가 2019년 연구 용역을 통해 이 인물의 친일행적을 확인했고, 안내판 설치를 시흥시에 요청했으나, 자자체는 “근거가 부족하다”며 이행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경기도가 친일행적자의 동상, 기념비, 송덕비 등 234건을 찾아내 2021년부터 지난 2년간 안내판 설치를 추진했으나, 고작 14건(6%)만 성공했다. 나머지 220건은 해당 지자체들이 “근거 부족”, “주민 반대”를 이유로 거부하거나, 도의 요청을 묵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행적은 명예와 관련된 중차대한 문제이므로 경기도가 경솔하게 요구한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점검해보기 바란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료적 증거와 역사적 논증을 제시해서 “근거 없다”는 근본 없는 반발을 깨끗이 잠재워야 한다. 타 시도처럼 관련 전문가 위원회를 상설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자체들도 논란에 휘말리지 말자는, 안이하고 소극적인 행정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국가보훈부가 지난 7월 홈페이지의 백선엽 장군 친일 행적 문구를 지웠다. 문구가 들어간 경위를 외면하고 친일인명사전 작업의 성과를 무시한 반역사적 처사라는 비난이 당연히 일었다. 정부부처도 지자체도 광복 80년이 다 돼 가도록 친일의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이 부끄럽다. 역사인식의 문제를 이념과 정파의 문제로 호도하면 안 된다. 불행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인물의 공과 허물을 함께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일본을 향해 역사왜곡 중단을 외치기 전에 우리의 자세부터 되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