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교동도는 강화군 북서쪽에 위치한 섬이다. 고려시대엔 벽란도로 가는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국제교역의 중간 기착지였다.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때 황해도 연백군에서 피난을 온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남북분단 이전 교동도와 연백군은 같은 생활권으로 왕래를 자주 했지만, 6·25전쟁이 끝난 뒤 피난민들은 지척에 둔 고향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교동도엔 기억할 만한 데가 수두룩하다. 그 중에서도 '대룡시장'을 으뜸으로 친다. 연백군에서 온 실향민들이 고향에 있는 시장인 연백장을 그대로 본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남북관계가 호전 또는 경색될 때 언론의 조명을 받는 단골공간이기도 하다. 시장골목 곳곳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벽화·조형물과 오래된 간판 모습 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교동도를 찾는 이들은 시장·이발관·약방·다방 등의 노포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전통 주전부리를 맛보기기도 한다.

정전협정(7월27일) 70주년을 맞아 지난 26일 강화 교동도 일대에서 '한강하구 중립수역 평화축제'가 열렸다. 참가자 100여명은 평화 순례에 이어 인천난정평화교육원에서 음악회와 집담회를 개최하며 평화 의미를 되새겼다.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가 여의치 않아서 순례로 대체했다고 한다.

중립수역으로 남은 한강하구는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조강(祖江)'으로 불렸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지고 나서 황해(강화만)로 흘러드는 '할아버지 강'이란 뜻이다. 한강하구란 명칭은 정전협정과 동시에 붙었다. 협정문엔 “한강하구 수역으로서 그 한쪽 강안이 일방의 통제 하에 있고, 그 다른 한쪽 강안이 다른 일방의 통제 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용선박 항행에 개방한다”는 합의 내용이 담겼다. 남북은 2018년 공동수로조사를 마쳤지만, 뱃길은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한강하구는 여전히 아픔을 안고 흐르는 셈이다.

교동도를 찾는 길은 2014년 7월 교동대교 개통으로 더 편리해졌다. 수도권에서 하루 일정으로 여행 삼아 돌아보기에 그만이다. 북한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들은 망향대에 올라 향수를 달래고, 여행자들은 해안가 철책선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길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북녘땅이 손에 잡힐듯 가까운 거리에서, 시대의 아픔과 분단의 현실을 체감하는 일도 의미 있다고 여겨진다.

포성은 멎었지만, 현재 누구의 물길도 아닌 한강하구가 활짝 열리는 날은 언제쯤일까. 이 땅에서 6·25전쟁과 같은 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선 결코 안 된다. 하루빨리 진정한 평화가 도래하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이루기를 학수고대한다.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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