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0월 설립해 우리나라 첫 성냥공장으로 알려진
인천 동구 금곡동 조선인촌주식회사보다
32년 일찍 서울 용산에서 성냥 공장이 있었다는 증거는 많아…
서양인 로젠바움은 용산에 유리공장을 지으려다 성냥제조로 방향을 바꾸고
조선정부에 허가를 요청, 1885년에 공장가동에 성공한다
▲ 김성수 인천공항본부세관 여행자통관검사관 과장

“우리나라에서 성냥공장이 만들어진 것은 1917년 10월4일로 이 자리에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시작됐습니다.” 인천 동구 배다리성냥박물관에 적힌 이 문구는 유지될 수 있을까. 인천공항본부세관 여행자통관검사관 김성수 과장은 “개항기 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에 설립됐었다는 그동안의 설은 틀렸다”며 여러 사료들을 인천일보에 공개했다. 1917년 10월 설립해 우리나라 첫 성냥공장으로 알려진 인천 동구 금곡동 조선인촌주식회사보다 32년 일찍 서울 용산에서 성냥을 생산 수출하던 공장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넘친다는 게 김성수 과장 설명이다. 물론, 학계 내 확정된 입장인 '국내 첫 성냥공장은 인천'이라는 역사 정론에 도전하려면, 치열한 연구를 수반한 뒤 결론에 이를 일이다. 우선, 김성수 과장이 확보한 사료를 토대로 주장하는 만큼 김성수 과장 기고 전문을 싣는다. 참고로, 김성수 과장은 해관사료 수집 연구가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를 발굴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앞서 2013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로 알려졌던 인천해관 세무사의 공관위치가 나타난 해관문서속의 도면을 찾아내어 근대사의 오류를 바로잡은 바 있다.

▲ [로젠바움 관련 기사] 미국 공사 알렌은 로젠바움이 세운 유리공장이 묄렌도르프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프로젝트이었으며 후일 성냥공장으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자료제공= 김성수 인천공항본부세관 여행자통관검사관 과장

최초 성냥공장과 관련해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면 서양인 로젠바움과 묄렌도르프(P. G. von Mollendorff)가 될 것이다. 로젠바움이라는 미국인이라면 공교롭게도 인천의 개항 초기에 2명이나 입국해 있었다. 한 사람은 창설한 조선해관에 채용돼 원산해관에 방판으로 배치된 라심본(羅心本 S. Rosenbaum)으로 그는 초대세무사 라이트(Thomas W. Wright)가 아직 입국하지 않았던 시기 세무사를 대리하였다. 또 다른 로젠바움은 라생보(羅生寶, Joseph Rosenbaum)라는 자로 입국 전 청나라 상해에서 화순양행(和順洋行)이라는 간판을 걸고 문구와 끽연 제품을 취급한 상인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대상은 당연히 후자 라생보이다.

그의 이름이 인명부(Directoy & Chronicle)에 처음 오른 시기는 1874년이니 적어도 그 이전에 청나라에 입국했을 것이다. 그는 상해에 자리를 잡고 Auctioneer, 즉 경매사로 사업을 시작했다. 10년 정도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묄렌도르프와 인연을 맺은 결과 1882년, 조선의 초대 총세무사 겸 외부협판이자 강력한 실세로 부상한 묄렌도르프의 측근 라생보에게 천재일우의 사업 기회가 찾아왔다.

 

파리국(玻璃局) 설치

전후관계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1883년 7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에서는 라생보가 신청한 용진 파리국(龍津 玻璃局) 설립을 특허했고 고종의 재가를 얻어 8월3일, 통리아문 주사 박제순(朴齊純)을 방판에 임명했다. 용진은 곧 지금의 용산이며 '파리'란 유리의 다른 이름이니 조선정부가 유리를 제조하는 기업에 투자하고 이를 감독할 관리를 지명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용산 당산리(堂山里)에 공장을 지을 부지 50묘(畝, 1묘는 약 30평)를 내어 줬다. 라생보는 주식회사 형태로 창업하고 투자금을 유치하려고 생각했다. 당초 목표액 3만달러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어렵지 않게 여러 명으로부터 수천달러 자금을 유치하고 주식을 나눠줬다. 조선 최초 주식회사가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상황을 '런던 앤 차이나 텔리그라프'는 동사 지면을 통해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지난번 프랑스 증기선 편으로 로젠바움과 일행이 상하이로 떠났다. 그는 노련한 유리 제조 장인들과 함께 조선에서 유리 제조를 시작한다. 조선 창호지를 바른 창문은 유리로 끼워지며 곧 보헤미안 제품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하고 유리 제조 사업은 착공조차 못 하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원료로 쓸 한강에 지천으로 있던 모래를 검사하기 위해 내한한 외국 전문가의 감정 결과 품질이 유리제조용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결정적이었다고 전한다.

 

조선성냥공장의 등장

▲ ① [로젠바움 관련 기사] 미국 공사 알렌은 로젠바움이 세운 유리공장이 묄렌도르프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프로젝트이었으며 후일 성냥공장으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② [로젠바움의 친필 서한문] 미국공사 포크에게 보낸 서한문으로 성냥공장이 이미 완공됐다는 것과 투자자들로 받은 투자금 내역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③ [성냥공장 특허장 사본] 1885년 9월3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라생보에게 일정한 조건을 달아 성냥공장 설립을 허가하는 특허장을 미공사 푸트를 통해 내줬다. /자료제공= 김성수 인천공항본부세관 여행자통관검사관 과장<br>
▲ [성냥공장 특허장 사본] 1885년 9월3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라생보에게 일정한 조건을 달아 성냥공장 설립을 허가하는 특허장을 미공사 푸트를 통해 내줬다. /자료제공= 김성수 인천공항본부세관 여행자통관검사관 과장

예상치도 못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허망하게 끝낼 수 없었던 그는 성냥 제조로 사업 방향을 바꾸고 외교채널을 통해 조선정부에 재차 허가를 요청했다. 신청받은 외아문 독판 김윤식(金允植)은 1885년 7월25일, 숙고 끝에 소정의 세금납부와 1년 내 사업개시라는 조건을 달아 특허를 내줬다. 인허가 과정에는 묄렌도르프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자본금은 유리공장을 짓기 위해 조달한 투자금과 새로운 사업 성냥공장 추진을 위해 투자가들로부터 끌어들인 자금 1만3000달러에 달했다. 당시 인천해관의 1분기 징세액에 맞먹는 이 거액의 출처는 고종을 비롯해 고위관료와 조선해관 총세무사 묄렌도르프, 그리고 해관원들이었다.

▲ [로젠바움의 친필 서한문] 미국공사 포크에게 보낸 서한문으로 성냥공장이 이미 완공됐다는 것과 투자자들로 받은 투자금 내역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br>
▲ [로젠바움의 친필 서한문] 미국공사 포크에게 보낸 서한문으로 성냥공장이 이미 완공됐다는 것과 투자자들로 받은 투자금 내역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자료제공= 김성수 인천공항본부세관 여행자통관검사관 과장

로젠바움은 일본인 목수와 공장건축을 계약하고 건물을 완공했을 뿐 아니라, 유럽에 가서 오스트리아산 설비를 구입해 들여왔으며 조선인 직공들도 채용해 마침내 공장 가동에 성공한다. 몇 개월 후, 미국공사 포크에게 보낸 서한에 '현재 20명의 조선인을 고용하고 있으나 완전 가동하면 120~150명을 고용할 수 있고 꾸준한 일자리 제공으로 종업원 1인당 하루 120~150푼을 지급할 수 있다'고 장담할 정도로 공장은 순조롭게 가동되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운이 없었다. 조선산 성냥이 출하되자마자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갈 것을 기대한 것도 무색하게 가격경쟁력도 품질면에서도 도무지 외국산과 경쟁이 되지 못해 존폐 위기에 놓인 것이다. 청나라해관에서 발행한 1886년도 해관연보에 실린 인천해관 서리세무사 쉐니케의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려스럽게도 성냥 수출은 수년 내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60달러어치 60그로스가 선적됐다. 이 성냥들은 유럽인 감독하에 서울 근교 양화진에서 제조된 것이다. 성냥공장은 불운한 환경들이 거듭된 탓에 사업지속을 성공적으로 보장받기에는 부족했고 전체 설비는 팔려 천진으로 옮겨졌으며 중국인들의 보호하에 가동될 것으로 믿는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파산이었지만 이 성냥공장은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개항 초기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설립된 주식회사였으며 내수와 수출을 위한 공장으로 준공됐고 실제 수출을 한 기업이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설명을 통해서 인천에 개항기 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이 설립되었다는 그간의 설은 틀렸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된다. 물론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합병된 이후 인천이 조선 성냥사업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서울에 성냥공장이 등장하고 나서 30여년 이후의 일이다.

/김성수 인천공항본부세관 여행자통관검사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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