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도성당 전경.

▶ '신도4리=신촌'의 형성 과정

신촌을 형성했던 피난민은 1951년 1·4 후퇴 이후로 정착하기 시작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시도, 모도, 장봉도 등 이웃 섬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정착 과정은 1950년대 중반 80여 가구가 신도로 이동하여 일부 가구는 원주민 집에서 방을 구해 살았고, 대다수는 인적이 드물고 사람이 거주하지 않던 산림지대에 임시로 토막집을 짖고 집성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이어서 1950년대 후반 난민정착사업을 통해 간척사업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추가 입도하면서 규모가 더 큰 새동네(뉴타운)가 생긴 것이다. 그런 연유로 '신촌'이라 명명하였고, 마침내 1966년 12월1일부터 '신도4리'라는 행정구역이 새롭게 만들어지게 됐다. 초대 이장은 안승진이었다.

 

▶ 신도에 천주교 도입과 발전과정

현재 신도3리에는 신도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의 시원은 난민정착사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북도면에서 천주교 관련 활동이 가장 먼저 있었던 곳은 장봉도다. 이후 신도에서 천주교 활동이 이어지는데, 관련 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7년 당시 부천군에는 윤을수 신부가 운영하는 구산후생학교(鳩山厚生學校) 사회반 학생 박마리아 등이 장봉2리에 하계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최명칠씨 댁에 거주하며, 밤에 주민들에게 천주교 교리 공부를 한다는 것을 당시 북도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최의식씨가 알게 됐다. 그는 부천의 구산후생학교로 윤을수 신부님을 찾아가 신도(信島)에도 사회반 학생을 정식으로 파견하여 줄 것을 건의한 결과 1958년 2월 지테레사, 정요셉 학생 2명이 파견되어 신도3리 김종철씨 집에 거주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시작했다. 그 후 정사선씨 댁으로 옮겨 교리 공부를 하다 1959년도에 99㎡(30평) 규모의 공소 건물을 신축하였다.

점차 교세는 확장되어 1963년에는 신도리 270-2번지 주변 임야에 165㎡(50평) 규모의 인천답동성당 신도공소와 66㎡(20평) 규모의 관사를 신축하였으며, 초대 공소 회장이 최의식이다. 1965년에 구산후생학교 학생들이 본교로 복귀하면서 뒤이어 홍마리아, 박바울나 수녀가 파송되었으며, 영종성당 신도공소였다. 1969년부터는 수녀들이 본원으로 돌아가고 선교사들이 주재하였으며, 본당도 영종성당에서 송림성당 그리고 제물포성당으로 바뀌다가 2006년 12월 1일 신도성당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주임신부로 김복기(야고버) 신부가 부임”했다고 한다. 구산후생학교는 2년제 여자 초급대학 수준으로 학리 탐구보다는 전쟁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여 배움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교육을 하였다. 특히, 학생들은 각 지역에 일정 기간 실습생으로 파견되어 의료반과 함께 무의촌 방문, 구호, 개간 및 간척사업을 돕는 일을 했다.

 

▶ 천주교와 공생조합과의 관계

미국의 가톨릭 주교로 구성된 천주교구제회(NCWC)는 세계 각국에 구호물자를 보내는데 우리나라는 1954년 서울에서 본격적 사업을 전개했다. 북도면과 관련해서는 1950년대 후반에 간척사업으로 갯벌의 둑을 막아 염전이나 논을 조성하여 난민 정착을 도모하기 위해 마을 주민 중심의 '공생조합'을 만들고, 여기서 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구호품을 제공하였다. 게다가 천주교를 믿는 사람에게만 기회를 준다고 하여 신도3, 4리의 많은 주민은 천주교를 믿게 됐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관련기사
[김석훈의 보물섬] 신도의 70년 전 뉴타운, 신촌과 둑 막기 공사 신촌은 '새 신'과 '마을 촌'의 합성어다. 글자 그대로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며, 요즘 말로 뉴타운이다. 세계적으로 신촌이나 신촌을 의미하는 지명은 꽤 많다. 국내는 물론 한인 해외 거주의 역사에서도 적잖게 볼 수 있다. '새로운 한국인 마을'을 뜻하는 '신한촌', '한족이 흥한 마을'을 의미하는 '한흥동'이 있는데, 이곳은 일종의 '신촌(뉴 코리아 타운)'인 셈이다. 현재 북도면에도 70년 전 건설된 뉴타운인 &# [김석훈의 보물섬] 북도면 신도(信島)의 중등 교육기관 ▶ 중등교육, 1950년 '해광고등공민학교'로 시작1950년대 부천군 시절, 당시 부천군 내 섬 지역의 6개 면에서 유일하게 중학교가 없던 북도면. 광복 이전은 기초 교육이 북도면 4개 섬마다 강습소 등에서 한학교육을 했고, 8.15 광복 이후에는 섬마다 초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상급학교가 없어서 생활의 여유가 있는 일부 자녀만 인천으로 유학하였고, 대부분은 부모의 생업을 돕거나 배 생활을 하는 처지였다. 이런 교육 현실을 안타까워했던 신도리 주민 천용택이 후손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김석훈의 보물섬] 북도면 신도의 초등교육기관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교육열은 빼놓을 수 없다. 육지보다 교육 여건이 더 열악했던 섬 지역은 어땠을까? 섬 지역 지식인들은 공동체 정신을 담아 절박한 심정으로 학교 설립을 위한 결사체를 구성하고, 모금 활동과 당국에 진정하는 등 다각도로 자구책을 강구했다. 옹진군 북도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교육 기관 설립 추진을 위해 100년 전부터 교육의 열기는 매우 뜨거웠으며, 초창기 교육 및 행정시설은 신도(信島)에 집중됐다. 신도 교육의 기저를 이루는 초등교육 시설은 언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을까? ▶ 초창기 [김석훈의 보물섬] 대청도 중등교육의 시작, 대청고등공민학교 대청도 중등교육의 시작은 초등교육보다 40년 정도 늦다. 초등교육은 대청공립보통학교가 백령도보다 5년 먼저인 1932년 시작되어 대청군도에서는 가장 빠르지만 중등교육의 사정은 다르다. 고등공민학교는 형편이 어렵거나 배움의 기회를 놓친 학생을 위해 마련된 중학교 수준의 과정이며, 광복 후나 6·25전쟁 후에 신설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대청도에서 중등교육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현재 대청중고등학교의 개교는 1970년대 후반이나 대청중학교의 전신이었던 대청고등공민학교는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대청고등공민학교에서 1970년대 교사 [김석훈의 보물섬] 북도면의 해상 교통 변천 약사 도서 지역에서 해상 교통 문제보다 더 시급한 건 없다. 도서 지역의 교통은 육지 왕래는 물론 평상시 수산물 처리 등 먹고사는 문제, 즉 산업 경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북도면의 교통은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을까? ▶일제강점기 해상 교통1925년에 간행된 조선총독부 관보(3819호)에는 “강화군 사기리에서 북도면 모도 사이의 도선(渡船) 관리 지정을 폐지”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 사실로 보아 1925년 이전 북도면의 해상 교통은 강화도 남단에서 통행이 이루어졌고, 관(官)에서 선박을 지정하여 운항했음을 알 수 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