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海關)은 오늘날의 세관을 일컫는다. 조선 말 개항 후 창설된 관세 행정기구다. 개항과 함께 외국과의 근대적 무역관계가 형성되자, 인천·원산·부산 등 세 개항장에 설치했다. 처음엔 외국인을 고용해 수출입 화물에 대한 관세행정 사무를 위임했다. 개항 초기 근대문물의 수입창구로서 그 기능과 역할이 컸다고 한다.
당시 조선엔 관세 행정·해관 운영 등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부득이 외국인을 고용해 총세무사(總稅務司)라는 직책을 주고 해관 창설과 운영 전권을 맡겼다. 이러한 사명을 띠고 고용된 인물이 독일인 묄렌도르프였다. 그는 우선 해관 위치 등을 결정하려고 각 개항장의 현지답사를 했다. 그래서 1883년 6월 인천 해관에 이어 원산·부산 해관이 각각 창설되기에 이른다. 1907년 4월엔 해관이란 명칭을 일본식 '세관'으로 개칭했다. 이듬해엔 일본의 관세 행정조직을 그대로 모방·시행해 일본 세관의 일부로 흡수·통합했다고 알려진다.
6월16일은 인천 해관 창립 14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인천은 부산과 원산보다 늦게 개항했으면서도, 처음으로 해관을 설치했다. 그만큼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했다는 방증이다. 바다의 길목을 지키던 인천에 해관이란 '빗장'을 세워 나라 살림을 보태는 데 한몫을 했다. 인천 해관은 국내 황해 일대를 관장하며 서울에도 '인천 해관 서울지소'를 설치할 정도였다. 인천은 시나브로 '경제 수도'임을 내세웠다.
인천 해관은 서해 전반을 아우르는 아주 커다란 조직이었다. 전라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평안도 등을 인천 해관에서 담당했다. 진남포에 해관을 짓고, 서울·목포·군산 등지에 지소를 설치할 때까지 사실상 한반도의 절반 이상을 통제했다. 인천 해관을 통해 전국 첫 팔미도 등대와 기상대가 들어서기도 했다. 바닷길을 안내하고, 기상을 관측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서다. 그 무렵 인천은 수출입 무역·물류·상업·공업 등 재정부터 인적·물적·문화 교류까지 왕성하게 이뤄나가, 서울 버금가는 큰 도시로 성장했다.
외세 침탈 목적으로 인천이 개항됐어도, 그때부터 해방까지 줄곧 '1등 도시'를 놓치지 않았다. 인천은 개항 후 조선·대한제국·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전국 1위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엔 인천 해관이 큰 몫을 차지했다. 1883년 1월1일 행정상 개항에도 의미를 둘 수 있지만, 실질적인 개항은 인천 해관을 설치한 후로 봐야 한다는 게 세관과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지금은 제1의 항만도시란 타이틀을 부산에 내준 상태지만, 근대에서 현대로 가는 관문에 인천 해관이 벌여온 역할과 기능을 잊어선 안 될 터이다.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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