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세월은 흐르고 있다. 소년은 어느덧 어른이 되어간다.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기도 했고,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외로움을 견디면서. 현실에 뛰어들어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 그들은 나쁜 어른들이었다. 소년은 그들과는 다르다며 스스로 위안했다. 소년은 푸른색으로 치장한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그 푸른색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나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쁜 어른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소년이 서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비록 어른이 되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소년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 “푸른색의 기억”만이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푸른색의 기억”은 어른으로 살아가는 시인에게 유일한 희망이며 위안이다. 어른으로 살아가며 비록 '나쁜'이라는 말을 피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푸른색의 기억”을 간직한 '소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인 것이다.

'소년'이게 하는 “푸른색의 기억”, 문득 궁금해진다. 나의 “푸른색의 기억”은 안녕한가.

▲ 권경아 문학평론가.
▲ 권경아 문학평론가.

/권경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