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학 양성의 꽃 영암문화재단
故 신종식 뜻에 따라 설립한 장학재단
1956년 창립이후 장학생 964명 배출
화성 향토교육사 공덕위해 비석 세워

故 신종식 선생 뜻 기린 다양한 업적
조부 이름에서 따와 무궁화 품종 출원
향토유적 문서 등 소장품 보존 '앞장'
'신용개 신도비' 유형문화재 22호 등재

인천일보 대표 취임 후 지역 이바지
2000년 대표이사 맡아… 언론 새 지평
지역지 최초 하프 마라톤 유치 '공로'
국내 대표하는 5대 마라톤으로 꼽혀

“여기 향남터에 중등교육의 효시를 이루어 주신 님의 두터운 슬기와 밝으신 믿음과 크신 어지심이 영원히 물결치리니 님이여 고이 잠드소서.”

1971년 영암 신종식 선생의 만장에는 화성 향토교육사에 남긴 공적을 기려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송헌 신화수(82) 영암문화재단 이사장이 한평생 지켜온 지론이기도 했다. 조부인 영암 신종식 선생의 뜻을 받들어 지역 교육사에 이바지해 온 그의 업적은 지역 사회의 귀감이 돼 오고 있다.

▲ 신화수 영암문화재단 이사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아낌없이 주는 나무

영암문화재단은 1956년부터 조부인 고(故) 영암 신종식 선생에 뜻에 따라 화성시 향남읍 발안리에서 후학 양성을 위해 설립된 장학재단이다. 신화수 이사장은 신종식 선생이 작고한 뒤 2007년부터 경기도 법인설립허가를 받고 영암문화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부임해 올해로만 67년째 장학사업을 벌여오고 있다. 재단은 창립되던 1956년부터 현재까지 964명의 장학생을 배출했다.

“조부이신 영암 신종식 선생의 뜻에 따라 현재까지도 꾸준히 장학사업을 벌여오고 있습니다. 영암문화재단이 배출한 장학생들은 보란 듯이 사회의 역군으로 성장했고, 때마다 잊지 않고 찾아주는 장학생들이 있어 보람을 느낍니다.”

영암문화재단의 전신은 화남중학원이다. 화남중학원의 설립자인 신종식 선생은 향남면 구문천리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향남면 초대면장을 지냈다. 당시 향남지역에 중등교육기관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주민과 힘을 모아 1950년 5월15일 화남중학원을 설립했다.

해방 후 경영상 어려움 등으로 1954년 국가에 헌납하면서 현재는 발안중학교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 화남중학원 설립 당시 가지고 있던 염전을 팔아 '향남육영회'를 조직하고 후진 장학사업을 펼쳐왔다.

선생의 화성 향토교육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향남의 지역민들은 1970년, 1989년, 2007년 등 3차례에 걸쳐 공덕비를 세웠다.

“조부님은 당대 신지식인이셨죠. 고등교육을 받은 인물이 지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많지 않았고 6·25 전쟁 이후 화성으로 낙향하셨을 땐 변변한 교육기관 하나가 없었죠. 그걸 안타깝게 여기셔서 천막을 치고 아이들을 가르쳐 오시다 현재 발안중학교 자리에 화남중학원을 설립하시게 됐습니다. 막상 화남중학원을 설립하고 나니 여학생들이 다닐 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더라고요. 여학교를 지으려고 염전을 팔아 부지를 매입했지만 끝내 여학교는 세우지 못했고 그 자리에 지금 영암문화재단이 있게 됐습니다.”

 

▲ 영암 신종식 무궁화 /사진제공=두피디아

▲ 지지 않는 무궁화

신종식 선생의 업적 중 하나는 무궁화 꽃의 특허 출원이다. 신 이사장은 조부의 이름을 달고 개발된 '지지 않는 무궁화, 영암 신종식 무궁화' 품종을 출원했다.

'영암 신종식 무궁화'는 심경구 박사가 신종식 선생의 뜻을 기려 무궁화 '홍대륜'과 무궁화 '삼천리'를 교배해 2009년에 개발한 무궁화이다. 해가 질 녘 시드는 기존의 무궁화와 달리 온종일 굳건하게 피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종식 선생의 굳센 의지와도 많이 닮아있는 꽃입니다. 온종일 시들지 않는 모양새가 정도를 걸어온 조부님과 많이 닮아있죠.”

영암문화재단에선 지역 문화재 보존 사업에도 나서고 있다. 고령 신씨 일가의 소장품으로 내려오고 있는 화성시 향토유적문서 300여건, 경기도문화재 85건, 서울특별시 문화재 1건 등 지역 향토문화재를 보존하는 일에도 영암문화재단이 앞장서 맡아오고 있다.

특히 종 2품 이상 벼슬의 무덤에 세운다는 '신용개 신도비'는 화성시 유형문화재 제22호에 등재돼 있다. 신용개는 신화수 이사장의 선대 종친으로 조선 성종부터 중종 대의 이름난 신하였으며 정1품 좌의정을 지냈다.

이 밖에도 영암문화재단은 영암문화포럼을 통해 지역사회발전을 위한 모색의 장을 마련하거나 고령 신씨 북백공파의 문화를 고증해 편찬한 '가장집' 등을 출간하고 있다.

“영암문화포럼은 지역을 대표하는 유지들이 모여 오로지 지역의 사안을 고민합니다. 우리 지역 사회가 밝아지길 기대하며 매달 머리를 맞대 지역의 평안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장집은 벌써 14권째 발간했습니다. 저희 선대부터 내려져 오는 고령 신씨 종친회의 역사가 14권의 책에 담겼습니다.”

 

▲ 신화수 영암문화재단 이사장이 인천일보 대표이사로 취임했을때 촬영한 기념사진

▲ 지역신문의 신화

영암문화재단은 지역향토문화 계승발전과 인재발굴, 장학사업을 주력 사업으로 해오고 있다. 오랜 시간 영암문화재단이 지역 사회에 역할을 해 올 수 있었던 중심에는 신 이사장이 있었다.

신 이사장은 십수 년 전 40년간의 오랜 공직생활을 뒤로하고 고향인 화성으로 내려왔다. 조부가 그랬듯 그 역시 고향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의지에서였다.

2000년엔 경인지역을 대표하는 일간지 인천일보의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언론의 새 지평을 열었다. 특히 2001년 당시 '인천국제하프마라톤'을 지역지 최초로 유치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역지로는 유일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의 개통을 계기로 마라톤을 유치하게 됐죠. 벌써 인천일보의 인천국제하프마라톤은 23회째 이어오면서 국내 5대 마라톤 가운데 하나로 대표되고 있습니다.”

한평생 지켜온 철칙이 있다. '정도(正道)를 걷고 순리(順理)'를 따르는 것. 그가 영암문화재단을 거쳐 간 장학생들에게도 강조하는 말이다.

“정도를 걷고 순리를 따른다면 비로소 행복이 뒤따라 옵니다. 선진국의 선진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 학생들이 올곧게 성장하길 고대합니다.”

▲ 신화수 영암문화재단 이사장이 자신이 한평생 모아 온 20만 여권의 책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