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에 중립을 지킨 이들에게 예약돼 있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가 <신곡-지옥 편>에서 했다고 알려진 말이다. 하지만 실제 단테가 이렇게 썼는지 아닌지를 두고는 논란이 있다.

<신곡>에 정확히 이 문장이 나온다기보다는 저런 의미를 전달하는 비슷한 구절만 있다.

단테가 스승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문을 들어서는 순간 사방에서 들리는 기괴한 탄식과 비명에 그는 겁을 먹는다. 끝없는 고통의 귀곡성이 무엇이냐는 단테의 물음에 베르길리우스의 답이 이랬다.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슬픈 영혼들이 이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다. 하느님께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았고 단지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저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도 섞여 있다. 하늘은 그들을 쫓아냈다. 그들이 하늘의 빛을 가릴 테니까. 그러나 깊은 지옥도 그들을 거부하니, 그들을 보고 지옥의 자들이 우쭐해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지."

이 글귀를 두고 루스벨트나 케네디 같은 미국 대통령들이 “가장 깊은 지옥은 비겁한 사람의 것이다”는 정도의 해석으로 단테를 인용해 각종 연설문에 사용하면서 지금의 내용으로 알려진 듯하다.

연유가 어떻든 이 수사는 섬뜩하다. 안 그래도 두려운 지옥 중에서도 심연의 구렁, 여기서 겪는 절대로 종료되지 않을 고통이 상상이 된다. 가장 깊은 지옥, 가장 뜨거운 좌석 이야기를 하면 희대의 살인마나 잔혹한 학살범이 떠오를 법도 한데 다름 아닌 '침묵'을 이보다 더한 죄악으로 설정한 부분도 그렇다.

아마도 뜻하지 않게 벌어지는 부조리 속에서 뚜렷한 입장을 밝히고 분연히 맞서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이 그렇지 않을 때, 그 오류에 대한 배신감과 개탄이 더 할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왔기 때문일 테다.

드러내놓고 악의 편에 붙어 악마가 되는 이들보다,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중립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실속을 챙기는 자들이 더 악질이라는 심판일 것이다.

오늘 이 순간도 세상은 어지럽고 과거는 후회스럽다.

인류가 역사를 거쳐 쌓아온 가치가 위협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한 개인을 그토록 관통해 왔던 청결한 원칙이 무너질 위기에 아무렇지 않게 놓인다. 이럴 때 누군가는 지키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연대를 이루고, 누군가는 후드득 무너지고, 누군가는 비겁을 경험한다. 또 스스로 비겁한 사람이 된다.

비겁한 이에게 궁극의 저주를 했던 단테와 그를 인용한 유명인사들 역시 크고 작은 자신의 '중립'에 잠 못 이룬 적도 있을 것이다.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김수영 시인도 1940∼50년대 한국의 탁한 사회를 비판하고 저항하면서도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처럼 끝내 용기 내지 않은 자신을 자조했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정의는 둘째치고 김수영처럼 위기의 순간에 지킨 중립의 자리가 얼마나 비천하고 부끄러운지 깨닫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는 걸 이제 와서 느낀다.

기회주의가 최종 승리한다는 세속적 결과와 무엇이 지켜야 할 선인지에 대한 흐릿함이 언제나 이들이 당당할 수 있는 명분을 주기 때문이다.

/장지혜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