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번뇌가 많은 건 기억력 때문이라더군.”
황약사는 '취생몽사'라는 술을 구양봉에게 건넨다. 어떤 여인에게서 받았다는 이 술이 지난 일을 모두 잊게 해준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리곤 마음속의 번뇌를 없애려고 취생몽사를 마신다. 사랑하는 여인의 희미한 실루엣이 스쳐 지나가듯 그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지는 걸 느끼면서….
영화 '동사서독 리덕스'(2008)는 장궈롱(張國榮), 린칭샤(林靑霞), 량차오웨이(梁朝偉), 량자후이(梁家輝), 장만위(張曼玉)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는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을 모티브로 하여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꾸민 프리퀄 성격의 무협영화이다. 사막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영상미와 가슴을 울리는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영화는 1995년작 '동사서독'을 새롭게 편집해 선보인 감독의 야심작이기도 하다.
팔고(八苦, 여덟 가지 고통)의 형상화를 통해 그려낸 인간의 번뇌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구양봉(장궈롱)의 객잔에 친구 황약사(량자후이)가 취생몽사 술을 들고 찾아오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는 생계를 위해 청부살인 중개업을 하는 무림 고수 구양봉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이 교차하면서 옴니버스식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번뇌의 고통에 휩싸여 괴로워한다. 그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팔고(八苦), 즉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을 못 만나는 고통), 원증회고(怨憎會苦, 증오하는 이를 만나는 고통), 구부득고(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오음성고(五陰盛苦, 오온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구양봉은 고향에 두고 온 여인(장만위) 때문에 번뇌한다. 그는 천하를 얻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떠나길 반복했고, 이에 지친 여인은 그의 형과 혼인하고 만다. 혼인날 구양봉은 그녀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제안하지만 그녀는 이를 끝까지 거절한다. 그 길로 고향을 떠나 사막으로 온 그는 애별리고와 구부득고의 고통을 느끼며 홀로 외로이 살아간다. 한편 황약사는 구양봉의 옛 애인인 그녀를 사랑하지만 고백하지 못한다. 그는 그녀의 구양봉에 대한 사랑을 질투하며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그중에는 대연국의 공주 모용언(린칭샤)도 있다. 남장을 한 그녀에게 황약사가 여동생이 있으면 혼인하겠다는 말을 하고 모용언은 그걸 믿고서 복사꽃 아래서 그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는 끝내 오지 않고 사랑이 증오로 바뀐다. 한편 눈이 멀어 가는 검객(량차오웨이)이 구양봉의 객잔에 온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친구 황약사와 정을 통한 아내가 원망스러워 집을 떠난 것이다. 이렇듯 엇갈린 인연으로 애증이 얽힌 인물들은 번뇌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친다. 형수의 죽음 소식을 접한 구양봉은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어 취생몽사를 마신다. 그리곤 술이 기억을 잊게 해주는 게 아니라 더욱 선명하게 살아나게 한다는 걸 깨닫는다.
부처가 설법한 사성제(四聖諦)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로서 고통(苦)과 고통의 원인(集), 고통의 소멸(滅), 고통의 소멸 방법(道)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는 고통의 원인인 집착에서 벗어나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수년 후, 구양봉과 황약사는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고군분투한다. 구양봉은 강호 속에서, 황약사는 은둔 속에서….
/시희(SIHI) 영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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