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동북아 시대의 관문으로서 중국과 대륙의 연결거점, 그리고 인천국제공항 개항 등으로 ‘트라이-포트(Tri-port)’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우리나라의 새로운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는 국제경제 네트워크의 중추로서 경제·금융의 흐름이 동북아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중국과 대륙 서방을 연결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 요충지로서의 역할이 기대된다.
명실공히 국제적으로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적기인 동시에 호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인천이 국제 물류·비즈니스 도시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시 자체의 기능적·공간적인 구조의 전면적인 재편이 요구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천의 도시화 과정은 어떠한 경로를 밟아왔는가.
인천의 도시계획은 외래문화의 유입, 일제의 식민통치, 6·25 동란 등의 역사적 격변기와 대규모 토목공사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화돼 왔다.
개항전 인천의 대부분은 해안 저지의 습지였으며 약간의 천수답과 나머지의 구릉은 소나무와 잡초가 덮인 황무지였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면 매립공사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인천은 해안선의 변화와 지역이 급격히 확장돼 왔으며 개항이래 현재까지 이 과정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구한말 인천의 개항으로 외국문물의 수입과 서구열강의 경제적 침략의 계기가 되어 전통문화와 서구문화가 공존 내지 대립하며 토착문화 경관이 급격히 변질되거나 소멸되면서 이질적 근대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개항과 동시에 인천에 설치됐던 ‘조계(租界)’는 면적이 겨우 15만평(0.496㎢)에 불과했고 존속기간도 1883년부터 1913년까지 30년간이지만 이곳의 구미적인 도시화는 향후 도시경관의 중요한 배경적 틀을 이루었다.
인천의 도시화는 개항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외국인 주도아래 상업 위주의 기능과 정미·양조 등의 소규모 공업으로 도시내 산업구조가 발달·변화하면서 외국인의 거주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외색이 짙었다.
교통수단은 경인선 철도이용 외에는 대부분 도보로 행해지는 수준에 불과했다.
1930년께부터 공업규모가 늘어나고, 큰 규모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시가지는 개항장 주변지역으로 확장되고, 인천∼서울간에는 여객·화물 자동차 교통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도시확장은 그러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발발원인이 됐다. 결국 이같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해 군수물자의 수요가 급속히 팽창하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인천의 중공업과 군수사업이 급격히 발전, 인천의 산업구조 변화까지 불러온 것이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도시계획이 시행되고, 확대되면서 구시가지 주변인 북부의 송림·만석동 지역과 남부의 용현, 학익동으로 도시경계가 확장됨과 아울러 부평지역에 또 다른 시가지가 조성됐다. 교통수단은 경인가도의 정비로 인해 더욱 빨라졌다.
그러나 1945년 해방과 6·25 동란의 혼란기를 맞아 도시발전은 다소 정체됐다. 이후 휴전이 되자 인천은 급속히 재정돈되기 시작했다.
1960년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되고, 경인지구 특정지역 개발계획에 따라 공업단지가 계속 건설되면서 본격적인 산업도시로서의 틀을 갖춰나갔다.
특히 임해도시로서 항만시설이 정비되고 경인철도의 복선화·전철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경인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서울의 상권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인천지역에서는 일상생활의 상업중심가가 서서히 분산되기 시작했다.
시가지의 형태는 고속도로와 경인선 철도 및 도로연변을 따라서 발달하여 구시가지와 부평시가지는 서로 연결됐다.
결국 인천의 도시화 과정은 개항을 계기로 상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기능을 가지고 월미지역, 신포동, 인천역 및 동인천역 주변지역을 기점으로 도시화가 시작됐다. 이어 고도 경제성장기에 접어들어 산업구조가 공업 위주로 변모하면서 도심지와 이어지는 시가지의 연담화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공유수면 매립에 의한 인천광역시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이는 향후 국제도시로서의 경쟁력 강화에 기초가 되고 있다. <조태현기자> choth@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