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에서 일요판으로 주간지를 발행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반세기전에 창간되었던 주간인천(1954년 4월12∼1960년 8월-창간 당시 사장 임영균, 주간 권성오, 편집국장 김응태, 문화부 김양수, 정치부 김상봉)시절을 생각해 보았다.
 이 때 우리들은 인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담아 살아 움직이는 지면을 만들려 했으며 밝은 소식을 많이 실어 독자들이 희망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민족상잔의 6·25전쟁 뒤 끝이라 휴전중 이었지만 민심안정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했다.
 주간 인천편집실은 인천의 문화사랑방이었으며 각 분야의 여러분들이 자주 모이셨다. 인천에 살면 인천사람이라는 주제로 많은 얘기들이 오갔다. 내가 사는 내 고장을 아끼고 가꾸어 살 맛나는 좋은 고장으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여러 방안들이 논의되었다. 그때는 정말 인천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안정과 평화를 간절하게 바라는 얘기들이 많이 교환되었다.
 이 사랑방 얘기광장에서는 고일(高逸)선생께서 주빈역할을 자주 맡아 하셨다. 선생께서는 주간 인천 창간호부터 인천석금(仁川昔今)을 연재하셨는데 이 읽을 거리는 회수가 거듭될 수록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인천의 모든 사건들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정리되어가는 듯했으며 신문이 나오는 날이면 다방은 온통 주간인천과 인천석금 얘기로 떠들썩했다.
 지면자(池面者-고일선생의 필명)의 인천석금은 시중화제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해방후 인천향토사의 시작이었으며 향토사 연구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놓았다. 인천석금은 용동요정에서도 여느 대포 집 에서도 큰 화제가 되어 좌중이 옛날 인천얘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얘기 꽃을 피우다가 통금사이렌 소리에 놀라 자리를 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곤 했었다. 이 때 일부 심통꾼들은 주간인천이 너무 흙냄새를 풍긴다고 하면서 시기하기도 했다.
 나는 못난이라고 하시며 지면자(池 못지 面 낯면 者 놈자)라는 필명을 쓰신 고일선생의 일화와 반세기전의 그 시절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니 온통 세상이 이기적으로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언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론의 회로(回路)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 변함없이 문화적 가치를 높여가고 있어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