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강화도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유물·유적을 두루 간직한 곳이다. 단군이 천제를 지낸 참성단도 그 중 하나다. 오늘날에도 개천절이면 민족 성지인 참성단에서 제례를 올린다. 강화는 고려시대 몽골과의 전쟁을 피해 천도할 만큼 천혜의 요새였다. 고려는 1231년 몽골이 침략하자, 이듬해 강화로 수도를 옮겨 몽골과의 항쟁을 벌여나갔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38년 동안이었다.

강화도엔 몽골 외에 외적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국방 유적이 많다. 실례로 1866년과 1871년 병인·신미양요 때 프랑스와 미국 함대와 격전을 치르기도 했는데, 당시 나라를 지킨 각종 진(鎭)·보(堡)·돈대(墩臺)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강화는 옛부터 근·현대까지 '격동의 역사'를 대변한다. 강화도를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으로 일컫는 까닭이다.

근대에 이르러 강화는 개신교 전파의 핵심이기도 했다. 1900년 국내 최초의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유럽과 동양의 양식을 조합해 한옥으로 건립됐다. 목재를 압록강에서 운반했으며, 경복궁 재건에 참여했던 목수가 맡았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건물로 평가된다. 아울러 1900년 설립된 감리교 잠두(蠶頭)교회를 빼놓을 수 없겠다.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인천 선교를 활발하게 펼치던 감리교에서 주목한 지역이 강화도였다. 낙후한 섬 곳곳을 살펴 전도에 노력한 결과, 지금도 강화엔 감리교가 대세를 이룬다.

잠두교회는 복음전도와 함께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에 진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1901년부터 잠두의숙(사립제일합일·여학교)이 문을 열어 열악한 강화 지역 교육 환경을 크게 개선했다. 이들 학교는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민족의식 함양에도 온힘을 쏟았다. 죽산(竹山) 조봉암(曹奉岩)은 이 교회의 민족운동 전개에 힘입어 세례를 받았다. 선원면에서 태어난 죽산은 강화 기독교계 민족교육 영향을 받았다. 3·1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첫 옥고를 치렀다. 그의 민족해방 투쟁이야 잘 알려진 사실이어서, 행적은 여기서 줄인다.

강화중앙교회(1976년 잠두교회를 개칭)에선 지난 15일 '강화 소년 조봉암 대한민국을 세우다'란 주제로 강연회를 연데 이어 오는 29일까지 '그리움-인천이 낳은 지도자, 조봉암'이란 사진전을 진행한다. 전시는 죽산의 일대기, 주요 업적 사진, 어록, 진보당 사건 자필서 등으로 구성됐다.

죽산은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에 이바지한 자랑스러운 인천의 인물이다. 전시회를 통해 국민들이 고루 잘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죽산의 '뜻'을 이어받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