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석의 지구촌./인천일보DB

“인천항 간만(干滿)의 차는 평균 30피트에 달한다. 항구 정면에는 높고 튼튼한 성벽이 있는데 이것은 소총 사수들이 상륙 병력을 방어하기 쉽게 되어 있었다. 상륙 부대는 일단 상륙 후에도 공격보다는 수비가 쉬운 대도시의 좁은 거리를 통과하면서 싸우며 길을 뚫어야 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7월24일 합참본부에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제안했으나 거부되었다. 8월23일에는 합참 전원이 도쿄에 모였을 때 또 다시 상륙작전 계획을 주장했고 8월29일에야 인천상륙작전을 승인 받았다.

▶상륙작전 계획은 신중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맥아더는 여러 상황이 유리한 9월15일을 선택했다. 오전 5시59분의 만조(滿潮)에는 유엔군 전함들이 월미도의 방어벽을 파괴시킬 수 있을 만큼 접근할 수심이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월미도와 인천내항의 방어상태와 조수(潮水) 상황 그리고 현지 사정에 관한 포괄적인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해군 중위 유진 F. 클라크를 월미도 서남쪽에 있는 섬인 영흥도에 비밀리에 상륙시켰다.

▶9월1일부터 9월14일까지 영흥도의 어촌 주민들이 클라크 중위를 숨겨주었으며 일부 주민들은 배를 타고 나가서 그가 요구했던 정보를 수집해서 전달했다. 9월13일 클라크는 망원경을 통해 월미도의 공산군 초소에서 자신이 침투해 숨어있는 영흥도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관찰하고 신속히 도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날 밤 황급히 영흥도를 떠나 본대로 귀환했다.

▶다음날 공산군 정찰대가 영흥도에 상륙하여 클라크의 흔적으로 의심되는 확실한 증거가 발견되자 공산군은 클라크를 도와주었다는 죄를 물어 영흥도 이장과 그의 딸을 포함하여 50여명의 섬 주민들을 사살했다. 전쟁이 치른 아픈 상처이자 대가의 한 부분이었다. 9월15일 계획대로 맥아더가 지휘하는 육해공군의 합동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압도적인 대성공이었다. 이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9월28일 신속한 서울 수복의 길이 열렸다.”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유엔군이 적군의 상황을 탐지하고 팔미도 등대 등 군사작전에 필수적인 시설들을 점검하기 위한 정찰대나 특수임무를 부여 받은 선발대들의 활약은 당시의 증언과 문헌으로 소상하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50여명이 넘는 영흥도 주민들이 미군 첩자들 도와주었다는 죄명으로 집단 사살을 당한 사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을 어떻게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필자는 이 같은 사실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평생 동지이자 대한민국 현대사의 산 증인인 로버트 T. 올리버 박사(1909~2008)의 저서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투쟁 (1942~1960)>이라는 역저를 통해 상세하게 재확인 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72주년을 맞아 희생된 영흥도민께 머리숙여 애도를 표한다.

▲ 신용석 언론인.<br>
▲ 신용석 언론인.

/신용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