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안이다. 뉴스와 음악 사이사이로 간간이 광고방송이 나온다. 귀청을 울리며 지나가는 광고 하나. “피로 회복에 아무 드링크”라는 약 광고다. 참 이상도 하다. ‘피로’를 ‘회복’해 준다고? 피로를 빨리 풀어야 하고 또 빨리 풀고 싶은 것인데, 드링크제를 마시고 그걸 회복하라고? 돈을 주고 그런 약을 사 마시는 사람도 있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그 광고가 잘못됐다. 제대로 했다면 ‘피로 해소’나 ‘피로 제거’가 되었으리라. 사실이 이런데도 우리는 이런 광고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저 그러려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들을 뿐이다.
 지금은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모르나, 필자가 군대 생활을 하던 60 년대 초에는 ’전통’이란 게 있었다. 제대로 말하면 ‘전언통신(문)’인데, 이를 줄여서 ‘전통’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문서로 된 정식 공문이 아니라 전화로 빨리 알리는 간단한 지시나 보고다.
 상급부대에서는 수시로 전통이 내려 왔고 우리는 또 이 전통을 우리 부대의 실정에 맞게 요약하여 하급부대에 내려보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전통을 내려보내는 것을 ‘때린다’고 한 것이다. “그것 정식 공문으로 보내지 말고 전통으로 때려”-이는 우리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말이었다. 상급부대에서도 보고가 빨리 올라오지 않으면 “전통으로 때린 것 못 받았나?”라는 말로 독촉하기도 하였다. ‘알린다’를 쓰면 될 것을 ‘때린다’를 쓴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전통으로 알린다’-얼마나 좋은가. 언젠가 이 점에 관심이 있었던 필자가 ‘전통접수부’를 ‘맞은 책’, ‘전통발송부’를 ‘때린 책’이라고 부르면 어떨까라고 말해 옆사람을 웃게 한 일이 있다.
 이 때린다는 말이 지금은 매체에서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난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상당한 의미 변화를 일으킨 것인데 ‘때린다’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공격성이 확대·외연되면서 그렇게 쓰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납득이 안 되는 경우가 있었다.
 오래 전의 이야기다. 축구장에서 해설을 하는 사람이 공을 차는 것을 때린다고 한 것이다. “김 아무개 선수가 때린 공이 골대를 넘었습니다. 이 아무개 선수가 때린 볼을 박 아무개 선수가 받아서 몰고 갑니다.” 야구시합이 아니다. 축구는 발로 차는 경기다. 그런데 발로 때린다? 발음하기가 편해서인가. ‘차다’보다 ‘때린다’는 음절도 길 뿐만 아니라 닿소리 ㅊ보다 ㄸ이 발음하기가 힘든다. 그런데 때린다는 단어를 써?
 지루하지만 사례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어떤 조그마한 식당. 필자가 점심을 들고 있는데, 정장을 한 신사 한 사람이 들어온다. 아는 사람인지 주인 아주머니가 인사를 한다. 정장한 신사가 하는 말. “음악이 뭐 이래. 최신 유행가로 때리지 않고.” 광고로 때린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음악으로 때린다는 말은 평생 처음 듣는 말이다. ‘때리다’는 품사로 말하면, ‘타동사’다. 타동사는 목적어가 있어야한다. 최신 유행가로 누구를 때리라는 말인가. 우리는 때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인가. 그렇지는 않으리라.
 요즈음 음식이나 술을 살 때, ‘산다’는 말 대신에 ‘쏜다’는 말을 쓴다고 한다. 주로 젊은층이 많이 애용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현상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무엇이나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면 곧 사라진다는데, 이런 현상도 얼마있지 않아 사라질 일시적인 현상인가.
 말에는 엄정한 규범이 있다. 필자가 위에서 든 몇가지 용례들은 이 규범을 지켰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무언가. 단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말의 요용이 아닌가 한다. 요즈음 이와 비슷한 오용이 아주 심한데, 날카롭게 경계할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