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훈도 논설위원.
▲ 양훈도 논설위원.

이완용이 앞에서 움직였다면, 윤덕영은 뒤에서 맹활약했다. 이완용이 7일간이나 아침저녁으로 고종을 협박했으나 실패하자 윤덕영이 나섰다. 윤덕영은 온갖 약점을 들어 고종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마침내 고종이 주저앉았다. 병탄조약을 최종 조인하기 직전,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울면서 국새를 감추었다. 누구도 어찌 할 수 없는 순간에 윤덕영이 나섰다. 윤덕영은 황후의 큰아버지였다. 윤덕영은 조카이지만 국모인 황후의 치마폭에서 국새를 빼앗았다.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의 맥은 그렇게 끊어졌다.

나라 팔아먹은 공로로 이완용은 백작, 윤덕영은 한 등급 낮은 자작이 되었다. 하지만 윤덕영이 서울 옥인동에 지은 집은 이완용의 땅보다 4배나 넓었다 한다. 경술국치 8적 가운데 윤덕영의 재산이 가장 많았다. 자신의 호를 붙인 대저택 '벽수산장'은 축구장 8개 규모(2만평)였다. 집 안에 능금나무 밭과 큰 개울이 흘렀다.

윤덕영은 50줄에 들어설 무렵인 1930년대 초에 구리에 별장을 지었다. 당대의 지관까지 동원해 터를 잡은 아차산 동쪽 기슭 별장에 그는 '등용동(登龍洞)'이라는 택호를 지었다. 용이 되고 싶었던 걸까? 임야와 대지 면적이 무려 3만9000평이고, 집터만 2300평이었다. 안채와 사랑채, 서고와 서당, 연못과 우물, 옥불(玉佛)과 7층 석탑, 해시계인 일영탑까지 갖추었다.

과시욕과 낭비벽 탓이었는지, 그의 후손은 옥인동 집과 구리 별장 등을 해방 직전 처분했다. 구리 별장은 헐리고 변형되어 1970년대 초 원형을 잃고 말았다. '등용동' 돌 표석, 일영탑 좌대 정도가 남았다. 그 중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푸이)의 휘호를 새긴 비석이 눈길을 끈다. '允執厥中'이라 새긴 이 비석은 이젠 민가가 된 집의 수돗가에 마치 빨래판처럼 방치된 상태다.

윤집궐중. '진실로 그 중심을 잡으라'로 새겨지는 <서경>의 한 구절이다. 커다란 돌비석까지 제작한 걸 보면, 윤덕영은 만주에 갔을 때 푸이로부터 받은 휘호가 무척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선통제는 세 살에 황제가 되었다가 청나라가 망하면서 일곱 살에 폐위되었다. 영화 <마지막 황제>(1988년 작)의 바로 그 푸이다. 휘호를 남길 무렵인 1920년대 초까지는 그래도 황제 칭호를 쓰도록 허용되었다. 이미 쫓겨난 청의 마지막 황제에게 '중심'은 뭐고, 나라 팔아먹은 자에게 '중심'은 또 뭐였을까?

윤덕영의 처는 1930년대 후반 전시동원 체제에서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한 금비녀 헌납 운동을 주도했다. 대책 없는 부창부수다. 그들의 생애를 드러내는 편린들을 이제라도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 어두운 역사와 후안무치한 통찰하는 교육도 우리의 책무다.

/양훈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