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한때 중구 용동 언저리는 술집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일제 강점기 시절 권번(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으로 흥청거렸던 상황이 이어져,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도 인천의 술꾼들을 불러 모았다. 일제 때 축현역(현 동인천역)과 지척인 용동엔 고급 요리집과 술집이 즐비해 경향 각지의 손님들이 즐겨 찾았다.

용동은 특히 주머니 얇은 젊은이들의 모임 장소였다. 나이 지긋한 이들은 신포동 일대에서 '술문화'를 이끌었다. 젊은이들이 신포동 부근에서 술을 마시는 일은 일종의 '사치'로 여겼다. 젊은이들이 용동으로 몰린 이유는 다른 데보다 저렴한 술값 덕분이었다. 술은 대부분 소주와 막걸리였고, 안주라야 값싼 빈대떡과 해산물 등이 고작이었다. 술값을 낼 돈이 부족해 기본안주를 계속 시켜 주인장한테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

용동에서 벌이던 '주당순례' 중 막걸리 열풍이 불었던 기억이 새롭다. 1977년 쌀 막걸리가 출시되자 너도나도 음미를 위해 장사진을 쳤다. 그 전엔 밀로 만든 막걸리뿐이었다. 주류에 쌀 사용이 금지된 탓이다. 쌀 증산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이 내놓은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은 쌀로 빚은 막걸리·소주·가양주 등이 흔하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다.

막걸리는 민가에서 빚던 막 거른 탁한 술이다. 한민족이 오랫동안 즐겨 마셔온 대표 술이다. 마시면 속이 든든해 농사를 지으면서 새참으로 들던 '농주'이기도 했다. 일제가 1934년부터 집에서 술을 빚지 못하게 한 뒤론 상업화한 탁주로 제조·소비됐다. 그러면서 민간의 다양한 막걸리는 점차 사라져 갔다.

지역마다 막걸리를 만드는 곳은 수두룩하다. 광역을 대표하는 공장도 존재한다. 인천시에선 인천탁주(소성주)가 유명하다. 그밖에 군·구 단위로도 막걸리 양조장이 명맥을 이어가는데, 인천에선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의 '금풍(金豊)양조'가 이름을 올린다. 지난달 말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지정하는 '2022년 찾아가는 양조장'에 인천시 1호로 선정됐다. 1931년부터 막걸리를 생산해 3대째 운영 중인 금풍양조는 옛모습(2층 목조건물)을 대체로 지키고 있어 구경하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90년 넘은 우물을 비롯해 서까래 아래 누룩을 띄우던 창고 등을 보존하고 있다.

금풍양조장은 아울러 인천시 문화재로 등록될 전망이다. 근대 공장의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시는 “금풍양조장이 건축 당시 원형을 유지하고, 개항기 이후 강화 지역의 산업화 과정과 변화·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밝힌 상태다.

지역 전통주는 관광·산업 등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 앞으로 잠재력 넘치는 술도가를 발굴해 문화공간으로도 자리를 잡게 했으면 어떨까 싶다. 전통의 소중함과 그 미래를 가늠할 관심이 필요한 때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