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훈도 논설위원.
▲ 양훈도 논설위원.

구리시와 서울시에 걸쳐 있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을 망우리 공동묘지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근현대 인물 묘역을 중심으로 묘원의 역사와 문화적 의미를 재발견한 덕분에 이름이 바뀌었다. 공원 안에는 5㎞ 남짓 되는 사색의 길이 있다. 삶의 이쪽과 저쪽, 과거·현재·미래의 접힘과 펼침을 헤아리며 거닐어보라는 뜻이겠다. 길 중간에 위치한 약수터 동락천에 이를 때쯤 목이 마르다. 동락천에서는 남녀든 노소든 함께 차별없이 시원하게 마시라고 샘물이 솟는다.

동락천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소파 방정환(1899~1931) 선생의 묘소가 나온다. 향로석과 상석 뒤에 봉분 대신 묘비만 세우고 자연석을 빙 두른 모습이 이채롭다. 유해를 화장하여 안치한 후에 쑥돌로 묘비를 감쌌다. 묘비에는 “童心如仙 / 소파방정환지묘”라 새겨 있다. “하늘나라를 닮은 어린이 마음(동심여선)”은 소파 선생의 신조를 잘 드러내주는 구절이다. 소파 묘소에 이르면 방금 마시고 온 동락천 물이 어린이와 어른이 동등하게 즐기라는 가르침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소파 선생이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쓴 게 1920년이다. 그해 8월 <개벽> 잡지에 실린 '어린이 노래 : 불 켜는 이'라는 번역시의 제목에서다. 수천 년 간 사람으로도 치지 않던 어린 사람들을 '이'라는 존칭을 붙여 불렀으니 그야말로 혁명적인 신조어였다. 인습에 젖은 고정관념을 한 방에 깨부수는 언어였기에, 1922년 '어린이날'도 각계의 호응을 받으며 제정될 수 있었다. 선생의 호 소파(小波)에는 잔물결처럼 어린이 존중하는 마음이 계속 퍼져 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담겼다.

몇 년 전부터 '~린이'라는 말들이 반성 없이 쓰이고 있다. 주린이, 요린이, 헬린이……. 그 분야에 서툴고 미숙한 사람, 초보자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는 듯하다. 무심히 들으면 재치 있는 말놀이 같지만, 헤아려보면 100년 전에 소파 선생이 타파하고자 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던 어른―어린이 서열화를 다시 뒤집어버리는 발상이라는 점에서 뒤끝이 씁쓸하다. 소파 선생이 30대 초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이 “어린이를 부탁하오”였다는데, 100년 후 우리는 '어린이'에 담긴 뜻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비평가들은 초창기 어린이 운동의 '동심천사주의'를 비판한다. 어린이를 천진무구한 존재로만 상찬하면서 생명력을 비롯한 어린이의 중요한 다른 특성들을 놓치게 했다는 지적이다. 내가 보기에 소파 선생은 동심천사주의자가 아니었다. 선생은 어린이가 어른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접받기를 바랐다. 천도교도였던 선생은 어린이 역시 하늘[인내천]이라고 믿었다. 선생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린이' 사상을 정교하게 발전시켰을 것이다.

/양훈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