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민 탐사보도부 차장

1999년 가을, 인천 중부소방서에서 근무했던 어느 소방관은 100명 넘는 청소년이 갇힌 채 쓰러진 화재 현장을 목격했다. 또 다른 소방관은 소방차와 구급차가 줄지어 있던 그날 동인천의 모습을 설명했다. 중환자실에서 일했던 간호사는 석 달여 만에 일반 병동으로 옮긴 학생과 보호자 대기실에서 기도하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제자를 떠나보낸 교사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국화를 잊지 못했다.

지난해 여름, 인현동 화재 참사 위령탑이 있는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 인터뷰를 했다. 소방관과 간호사와 교사처럼 대답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날의 기억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인현동 화재 참사 당시 고등학생이었지만, 머릿속에는 흐릿한 장면만 남았다. 때로는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무심결에 스쳐가는데도, 정작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날 이야기가 최근 '인천미래기억채집: 1999 인현동 화재 참사 기록'이라는 책으로 묶였다. 누군가의 기억들로 그날을 되짚었다. 법적으로 참사 현장은 청소년 출입이 가능한 공간이었지만, 한때 퇴학 처분이 내려졌을 만큼 희생자들은 불명예를 떠안았다. 참사의 근원이었던 불법 영업과 공직자 비리 문제는 자취를 감췄다. 진상 규명을 외친 유가족을 향해선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기록집을 펴낸 홍예문(門)문화연구소는 “사회적 신뢰의 부족으로 유가족과 부상자 인터뷰 참여가 저조했다”고 밝혔다. 20년 넘게 지났지만 인현동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며칠 전 통화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은 “아이들 명예가 회복되는 게 마지막 바람”이라고 말했다.

지난 3일 제74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렸다. 오는 16일에는 세월호 참사가 8주기를 맞는다. 시간이 흘렀어도 끊임없이 밝혀내고, 기록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이순민 탐사보도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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