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시장(송현동) 쪽 동인천(구)지하상가 출입구.

며칠 전 동인천역 부근에 갔다가 일부러 동인천(구)지하상가를 지나갔다. 이 통로는 중앙시장(동구 송현동)에서 동인천역(중구 인현동) 쪽으로 뚫린 길이 70m의 지하도다.

한때 사람들이 밀려다닐 정도로 혼잡했던 이 길은 이제 오가는 사람도 드물고 셔터 내린 점포들도 눈에 띄었다. 건설 초창기 상가는 없었고 백열등만 걸려 있어 흔히 '동인천 굴다리'라고 불렀다. 경인선 철길 밑을 살짝 파서 만든 반(半)지하도 형태다.

이 굴다리 건설에는 씁쓸한 사연이 있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놓인 이후 동인천 지역은 철길로 남북이 갈라졌다. 이 지하도가 생기기 전에는 송현동, 송림동 주민들은 인현동, 전동, 신포동 등 이른바 시내 쪽으로 가려면 배다리철교나 화평철교 밑을 통과해서 한참 돌아가야 했다. 철길을 무단횡단하다 철마에 치는 사고가 빈번했다.

1955년 인천시의회 내무위원회는 이 두 지역을 직접 통할 수 있는 지하도 설치를 결의한다. 그런데 인현동에 거주하는 주민 100명은 이를 반대하는 청원서를 시의회에 제출한다. 결국 지하도 건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들은 왜 이 지하도 설치를 반대했을까. 그 청원서가 전해오지 않기 때문에 반대했던 이유를 알 수 없다.

당시 시대 상황을 비추어 본다면 “섞이기 싫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비교적 발전했고 안정적이었던 남쪽의 동네 사람들은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빈궁한 북쪽 동네와 맞바로 통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들은 단절을 원했다. 북쪽 동네의 '숙망(宿望)'이었던 이 지하도는 1963년 11월20일 개통되었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놓인 이후 64년 만에 동인천의 남과 북이 뚫렸다. 비로소 인천은 섞였다.

요즘 한국 사회가 동과 서, 보수 대 진보, 남성 대 여성, 노년 대 청년으로 나뉘고 쪼개졌다.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단절되었다. 연결하고 섞이고 통합할 수 있는 굴다리들을 곳곳에 파야 할 때다.

▲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