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린이 지난 밸런타인데이에 “해피 밸런타인데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마일린은 두 번째 인연이 된 남편과 빨간 티셔츠를 맞춰 입고 초콜릿 사진과 함께 달곰한 메시지도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려놓았다. 밸런타인데이가 지난 지 벌써 한 달 가까이 되고 곧 화이트데이가 오는데, 마일린이 보낸 문자가 자꾸 떠오른다. 아마도 나와 마일린의 돈독한 우정과 인연 때문일 테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필리핀의 밸런타인데이는 시끌벅적하다. 아니 특별하기까지 하다. 밸런타인데이는 필리핀의 중요한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밸런타인데이는 원래 3세기 로마 시대 황제의 허락 아래서만 할 수 있었던 결혼을 밸런타인이라는 사제가 사랑하는 연인들을 황제의 허락 없이 결혼을 시켜준 죄로 순교 당한 것을 기리는 날이다.

가톨릭 인구 80%가 넘는 필리핀은 지역마다 수호성자를 정하고 그들의 생일에 맞춰 '피에스타'라는 이름으로 마을 축제를 벌일 만큼 종교성이 강한 나라이다. 오래전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세계 30개 국가를 대상으로 세계의 종교성에 대해 조사한 자료를 본 적이 있다. 그 조사에 따르면 필리핀이 80%를 웃도는 높은 점수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나타났다.

내가 사는 동네 아누나스에서 피에스타는 늦가을에 열린다. 아누나스의 피에스타 기간에 가장 큰 행사 가운데 하나는 동네 미인대회다. 몇 달 전부터 마을 주민들의 추천을 받아 온라인으로 먼저 호감도를 조사하고 후보를 정한다. 후보로 정해지면 행사비용을 위해 판매하는 입장권을 나누어주고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에게 판매를 시작한다. 상금도 걸려있기 때문에 과거 우리나라 미인대회에 유명 미용실 등에서 추천을 했던 것처럼 필리핀 또한 유력한 후보들에게는 스폰서가 달라붙는다. 물론 우리나라와같이 미인으로 선발되면 지역 모델 등으로도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한다.

나와 친자매처럼 지내는 마일린에게는 네 자녀가 있다. 그들 중에 둘째 엘라가 고등학생 때 주변의 추천을 받아 미인대회에 나갔다. 당시 나는 엘라를 후원하기 위해 여러 장의 티켓을 구매하면서 그녀가 미인대회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 식구가 모두 나서서 온라인 투표를 했고, 엘라를 위해 참가비와 드레스를 준비했다. 또 굽이 10㎝가 넘는 구두가 필요하다고 하여 구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세 번째 미인으로 선발되어 마일린 집 벽에는 몇 년간이나 엘라가 대회에 참가했던 사진이며 메달이 마치 200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돌잔치 때 유행처럼 만들었던 벽걸이 블라인드처럼 걸려있었다. 어둑한 집안에 걸린 멋진 드레스를 입은 엘라의 핑크빛 벽걸이 사진은 온 가족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마술그림 같았다. 이후 마일린의 첫째 아들 잔잔도 대회에 참석하여 동네에 얼굴을 알렸다.

밸런타인데이 문자로 시작된 이야기에 왜 마일린의 선남선녀 아이들이 생각났을까? 작년 이맘때쯤 마일린의 첫째 아들 잔잔이 여자친구와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했었다. 기념으로 그 아이와 사진을 찍었는데 내 어깨에 팔을 두르는 모습이 마치 엄마 마일린의 친언니처럼 편하게 생각한다고 느껴졌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하는 엄마를 따라 몇 차례 우리 집에 왔던 그 꼬마가 이렇게 컸구나 싶어 대견하기도 하고 내 손을 들어 자기 이마에 갖다 대며 인사하는 모습에 감동까지 밀려왔다. 어린 나이에 홀로 네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자신의 시간과 젊음을 바쳐 그 아이들을 길러내고 있는 친동생 같은 마일린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금도 마일린은 중국인 사장님 밑에서 쉬는 날도 없이 일에 매여있다. 마일린이 이 시기를 잘 견디고 주님 안에서 매일 즐거운 삶을 살게 되기를 마음속 깊이 기도한다.

/이정은 필리핀 아누나스 행복한우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