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나락은 조상 신줏단지와 거의 동격이다.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 귀신조차 씨나락을 먹어 치워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터무니라고는 조금도 없는 말로 풀이되는 건 이 때문이다.

광명시 옥길동 볍씨학교 어린이들이 연말연시 칼바람 한파에도 거리에 나와서 학교를 지켜달라고 소리치고 있다. 광명 볍씨학교에는 우리나라 최초 초등과정 대안학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광명시흥신도시가 계획대로 진행되면 옥길동 금오로 볍씨학교와 풀씨학교는 터전을 잃게 된다.

볍씨학교는 어린이(초등)와 청소년(중등) 과정이고, 풀씨학교는 유아교육(유치원) 과정이다. 광명YMCA가 1990년대 후반부터 여러 해 준비과정을 거쳐 2001년에 볍씨학교 문을 열었다. 그동안 수백 명이 볍씨학교를 거쳐 갔다. 변변한 학교 건물도 없어, 학부모와 졸업생, 학교 측이 푼푼이 모은 돈으로 2017년에야 겨우 4동의 건물을 갖췄다. 그런데, 3기 신도시 계획에 볍씨학교·풀씨학교를 보전하겠다는 얘기는 보이지 않는다.

“생명이 소중한 세상, 생명이 자유로운 세상은 크고 거대하기보다/ 작고 소박한 크기로 만들어진 세상일거라 믿습니다.” (볍씨학교 홈페이지 학교 소개글 중에서) 볍씨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시간표를 작성하여 생명과 함께 사는 법을 몸으로 익히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크고 화려한 신도시를 위해 작고 소박한 학교가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이 어린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볍씨학교 사람들만 광명시흥신도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이곳 토박이는 대부분 신도시 개발을 납득하지 못한다. 40년을 그린벨트로 묶여 산 세월도 그렇지만, 2010년 일방적으로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지정했다가 2015년엔 돌연 해제해버린 당국의 처사를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게다가 주민들이 2020년 말 어렵게 자체 계획을 세웠으나 일언반구 반응하지 않더니, 두 달 뒤 느닷없이 3기 신도시 예정지라고 공표해버렸다. 게다가 신도시 발표 직후 LH 직원들이 예정지에서 편법 땅 투기를 일삼았던 사실까지 발각됐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고 했다. 종자로 삼을 좋은 과일은 결코 먹지 말라는 엄한 훈계다. 주역의 다음 구절은 '군자득여 소인박려(君子得輿 小人剝廬)'다. 볍씨학교 이야기를 대입하니, '군자는 씨나락을 먹지 않아 백성의 추앙을 받고, 소인은 먹어치워 집도 잃고 만다'라고 읽힌다. “학교가 없어지면 마음이 더 추울 것 같아요.” 책임자에게 묻고 싶다. 수도권 주택공급이 아무리 화급하다 한들, 작고 소박한 볍씨학교마저 없애고도 속이 편하겠소?

 

/양훈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