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설움, 폐지수거 권하는 사회] 3. 여성의 굴레

김현숙 할머니의 고된 나날들

어린시절 다친 팔, 딸이라는 이유로 치료 못해…결국 절단
유일한 아들 오빠는 대학에 유학까지…명예와 부 축적

자식 돌봄·남편 병수발 '가장 역할'…70대 지금까지 이어져
넘어져 다친 다리는 치료도 않고 되레 자식한테 돈 보태줘
“부모는 어쩔 수 없어”…오늘도 반려견 사랑이와 골목 누벼
▲ 김현숙(가명) 할머니는 한 팔로 폐지를 주우며 세상을 살아간다. 여든을 향해가는 고령에도 여전히 자식 돌봄에서 자유롭지 않은 김 할머니. 고된 그의 걸음 옆에는 언제나 '사랑이'가 함께 하고 있다.
▲ 김현숙(가명) 할머니는 한 팔로 폐지를 주우며 세상을 살아간다. 여든을 향해가는 고령에도 여전히 자식 돌봄에서 자유롭지 않은 김 할머니. 고된 그의 걸음 옆에는 언제나 '사랑이'가 함께 하고 있다.

김현숙(가명·75·서구 석남동) 할머니 곁에는 '사랑이'가 있다. 올해로 8살 된 강아지 시츄다. 사랑이는 폐지를 찾아 동네 골목골목을 다니는 할머니보다 항상 한발 앞서 걸으며 안내한다. 사랑이 목에는 목줄이 매어 있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목줄을 쥐고 다니지 않는다. 아니, 손에 쥘 수 없다. 그의 하나 뿐인 팔은 폐지 실은 수레를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많고 내가 딸이라 부모가 그렇게 무심했나봐.” 할머니 기억은 6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용산구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교 가려면 철길을 따라 걸어야 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던 5학년 어느 날 등굣길. 발을 헛디딘 어린 현숙이는 기찻길에 고꾸라졌다. 넘어질 때 팔을 잘못 짚어 큰 충격과 함께 팔이 선로에 끼었다. 팔을 조심히 뺐으면 괜찮았을 텐데 아프고 당황한 마음에 무리하게 팔을 빼려다 팔이 꺾이고 뼈가 부러졌다.

하지만 병원엔 가지 못했다. 엄마는 풍으로 쓰러졌고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아버지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집안이 기울어가던 시기였다.

아들 하나 딸 다섯 집안에 넷째 딸로 태어난 현숙이. 그의 아픔은 집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망가진 팔을 움켜지고 지내던 현숙이는 결국 팔을 부여잡고 길 위에 쓰러졌다. 몸과 마음의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았다. 다행히 지나가던 미군이 쓰러진 현숙이를 발견해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제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상처는 깊었다. 첫 수술에서 오른쪽 손목이 잘려 나갔다. 두 번째 수술에서는 오른쪽 팔꿈치가 끊어지는 차가움을 느꼈다. 세 번째 수술 후, 어깨만 남았다. 현숙이는 팔을 잃었다.

현숙이를 발견했던 미군이 그를 입양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전쟁고아가 많던 시절이다. 하지만 아버지 반대로 입양은 이뤄지지 않았다.

불행은 이어졌다. 풍으로 쓰러진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그 자리를 계모가 메웠다. 계모에게 장애가 있던 현숙이는 세상에 내놓기 부끄러운 존재였다. 현숙이는 다락에 갇혀 살았다.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용변을 볼 때만 다락에서 나올 수 있었다. 계모의 손찌검도 매일 됐다. 3~4년간 두드려 맞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집을 나왔다.

그렇게 노숙 생활을 하며 흘러흘러 대구에 있는 시립희망원에 수용돼 거기서 남편을 만났다. 대구시립희망원은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 직권조사에서 부랑인들을 강제 집단수용하고 인권침해를 했던 곳으로 확인된 시설이다.

살기 위해 집에서 도망쳐 거리와 시설을 전전하던 현숙이와 달리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오빠는 집안이 망해 가던 그 시절, 대학을 마치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다. 대통령 표창까지 받고 미술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아줄 정도로 명예와 부를 축적한 인물이 됐다.

“잃은 재산을 되찾고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아버지랑 큰 언니가 오빠를 끝까지 뒷바라지 했더라고.”

남편과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둔 현숙씨는 30대 중반, 지인이 있는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삶은 여전히 고됐다. 남편은 신장병과 다리 한 쪽이 굳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현숙씨는 자식들 돌봄과 가장 역할 둘 모두를 해야 했다.

배움이 짧았던 현숙씨는 전문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택한 일이 가사노동의 연장선, 음식장사다. 부평에서 세 학교를 끼고 있는 목 좋은 곳에 떡볶이를 전문으로 하는 분식집을 차렸다. 좋은 재료와 현숙씨 손맛 덕에 장사는 꽤 잘 됐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남편의 병세가 점점 안 좋아져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감당이 더 이상 어려웠다. 콩팥이 망가진 남편을 위해 현숙씨는 자기 콩팥을 떼 주려 했지만 수술비 3000만원 앞에 포기해야 했다. 집 한 채 값이었다. 남편은 혈액투석도 받아야 했지만 역시 돈이 문제였다.

그렇게 15년을 투병한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현숙씨 마흔 여덟 되던 해다.

현숙씨의 돌봄과 가장 역할은 75세 할머니가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할머니 집 식탁에 놓여 있던 묵직한 검은 봉지. 그 안에는 햇반, 곰탕, 김, 소고기죽, 두부, 장조림, 요거트가 담겨 있었다. 수급자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던 식사가 코로나로 중단되면서 복지관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주는 식료품이다.

할머니는 요거트 말고 다른 식료품에는 손대지 않았다. 막내아들에게 주기 위해서다. “우리 막내가 저녁에 음식 배달하더라고. 내가 이거 하나도 안 먹고, 걔 다 가져다줘. 먹을 게 없어 걔가. 너무 힘들어서.”

세상은 김 할머니의 남은 한 팔로 지탱하기 버거운 무게였다. 남편 병수발과 세 자식 키워낸 튼튼한 팔이지만 예전 같지 않다. 팔 인대 네 개가 끊어져 수술했기 때문이다. 폐지 줍는 일을 평소보다 조금만 더 해도 그새 팔이 아파 이부자리를 펴고 얼른 누워야 하는 몸이 됐다.

타 지역에서 택배 일을 하던 큰 아들 어깨 인대가 끊어졌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비는 250만원. 다행히 산재보험 처리가 돼 수술비는 큰 문제가 안 됐다. 하지만 수술과 회복 기간 동안 벌이가 끊길 게 뻔하다 보니 당장 생계가 막막했다. 김 할머니는 그간 저축한 200만원을 탈탈 털어 월세라도 보태라고 아들에게 줬다. 장애연금을 받는 김 할머니가 지난 10년간 폐지 수거 일을 멈추지 못했던 이유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정작 당신은 돌보지 못했다. 겨울 빙판길에서 폐지 수레를 끌다가 넘어졌다. 엉치뼈가 잘못됐는지 조금만 힘들면 다리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신세다. 병원에 갔더니 엠알아이(MRI)를 찍어야 제대로 증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데 MRI를 찍는데 50만원이 필요했다. 할머니는 포기했다.

“부모는 어쩔 수 없어. 자식 뒷바라지 하려고 자식 낳는 거지. 병원에서는 24시간 중 20시간 누워 있어야 한다고 그러는데, 이렇게라도 나와야지 집에 있으면 온갖 생각이 다 들고 우울해서 도저히 못 있겠더라고.”

어린 나이에 팔을 잃었던 일조차 무덤덤하게 말하던 김 할머니는 자식들 이야기에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옆에는 할머니만큼 나이를 먹은 늙은 강아지 사랑이가 조용히 엎드린 채 눈을 감고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글·사진 이창욱 기자 chuk@incheonilbo.com

 


 

생존경쟁 치열해지는 일터

대상·연령층 다양화…女 입지 좁아져
82% “수거 경쟁자 있다”…평균 4.1명

고령 노인들의 일터로 여겨지던 폐지 수거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대상과 연령층이 다양해지고 있다. 동시에 이 시장에서 약자 위치에 놓인 여성 노인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최현욱(가명·37·연수구 청학동)씨는 인천일보 취재진이 무작위로 만난 폐지 수집인 20여명 중 유일한 30대였다. 그는 3년 전까지 인력사무소를 통해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주로 일했다.

최씨는 “인력에서 잘린 뒤 능력도 없고 할 일도 없었는데 폐지 줍는 일이 간단하고 편해보여서 하게 됐다”며 “새벽부터 할 때도 있고, 아침부터 밤새 할 때도 있는데 최고 많이 했을 때 하루에 160~170kg 정도 했다. 크게 힘들진 않다”고 말했다.

외국인 특히 중국인들도 폐지 수집 일에 가세하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추홀구 도화동에서 만난 폐지 수집인 금계옥(가명·60)씨는 조선족이다. 이 일에 뛰어든 지 1년여. 좀 더 소득 높은 일을 하고 싶지만 몸이 허락지 않아 폐지 수집을 하게 됐다.

금씨는 “풍이 와서 몸 반을 못 쓰는데 젊은 나이에 놀 수는 없어 이 일을 한다”며 “얼마 못 번다. 야채 값이나 그저 번다. 남편은 나가 일하는데 그저 놀기만 하면 속상”해서 리어카를 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인천시고령사회대응센터 연구 결과를 보면 폐지 수집 경쟁자가 있다고 답한 사람이 82.8%에 달했다. 경쟁자 수가 몇 명이냐는 질문에는 '3~4명'이라는 비율이 41.8%로 가장 많았고 '5명 이상' 35.9%, '1~2명' 22.3%다. 평균 경쟁자는 4.1명이다.

/이창욱 기자 chuk@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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