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개항(1883년) 이후 인천의 대중음식문화도 빠르게 변모했다. 주로 일본인과 청인에 의해 이뤄졌지만, 청관거리 내 중국 음식점과 일본식 요리집 등은 국내 어디보다 내로라할 정도로 번창했다. 인천을 통해 서양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무렵이니, 어쩌면 당연했다고 여겨진다. 예나 지금이나 아등바등 삶에 천착하는 일도 다 먹고살기 위해 벌이는 몸짓 아니겠는가.

개항과 함께 일본인 인구가 급증하자, 자연스럽게 일식집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요리집은 대개 기녀(妓女)를 접대부로 고용해 술과 음식을 내놓는 형태였다. 우리 대중음식·술문화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어요리(御料理)'란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기 일쑤였다. 조선인들이 그를 두고 '요리집'이라고 부르면서 일반화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일본 요리집이 속속 정착하면서 나온 게 권번(券番)이었다. 이를테면 권번이란 기생을 관리하는 업무대행사. 등록된 기생을 요청에 따라 요리집에 보내고 화대를 받는 일을 맡았다. 권번은 일본에서 온 용어로, 게이샤들에게 춤·노래·악기연주 등을 가르쳤던 일종의 '기생 양성소'다. 우리 권번에선 매일 초일기(草日記)란 명단을 요리집에 보내 단골손님 등이 기생을 부르게 했는데, 물론 예약도 가능했다. 권번에선 인물·가무 등을 살펴보고 신입 기생들을 채용해 키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중구 용동엔 1910년을 전후해 용동권번이 들어서 성황을 이뤘다. 아직도 용동 골목 마루턱에 '龍洞券番'과 '龍洞券番 昭和四年六月 修築'(용동권번 소화 4년 6월 수축)이라 새겨진 문구가 남아 있을 만큼, 대단한 세력을 과시했던 것으로 읽힌다. 이런 용동권번과 인연을 맺어 잘 나가던 '예인'도 많았다. 이화자·복혜숙·이화중선·유신방 등이 그들이다. 이들 유명 예인은 물산장려운동과 이재민돕기운동 등 지역사회 일원으로서도 적극 참여해 세인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용동권번에서 이름을 떨친 이화자(李花子)를 주인공으로 삼은 음악극이 대중에게 선을 보여 눈길을 끈다. 1915년 부평에서 출생한 이화자는 예인의 품행 덕목을 익히고 나중에 가수로 발탁돼 레코드를 내며 국내외를 누빈 '스타'였다. '월미도', '화류춘몽', '화륜선아 가거라' 등 100여곡의 음악작품을 남긴 그를 오늘에 되살리는 일은 오늘날 세계를 뒤흔드는 K-pop 열기와도 맞물려 아주 새롭다.

인천콘서트챔버가 준비해 12일 열린 '이화자 전' 소프라노·바리톤, 바이올린·아코디언·첼로 악기가 어우러져 그이의 삶을 조명했다. 이달 중 음악극 공연영상은 인천콘서트챔버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될 예정이다. 차제에 인천과 깊이 관련된 인물들을 소환해 새롭게 찾아보는 일이 인천 각계로 퍼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