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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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일 논설위원

강화(江華)는 흔히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그만큼 강화 곳곳에선 유물·유적이 보이고, 또 출토된다. 고려시대 몽골 침입에 저항하기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것도 이에 한몫을 한다. 강화는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 외적의 공격을 방어할 성을 쌓는 데 최적의 요건을 갖춘 곳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각국에서 요충지로 여기고 쟁탈을 위해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다.

강화 주민들은 지금도 강도(江都)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한 국가의 서울을 천도(遷都)한 데 대한 자부심에서다. 근대에 이르러 일본·프랑스·미국 등이 우리를 넘보며 침탈을 시도할 때도 강화는 주무대였다. 여기엔 강화 주민들이 대거 동원돼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를 하며 나라를 지키는 데 일조했다. 주민들 사이에서 아직도 강화 특유의 '사투리'를 쓰고 있는 점만 봐도, 이들의 자긍심과 자존심이 읽힌다. 현재 인천시(강화군)에 속하지만, 주민들은 인천과는 다른 고유의 풍속과 기질 등을 갖고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강화에서 새로운 유적이 나와 관심을 모은다. 고려가 13세기 몽골 침략에 대비해 쌓은 '강화중성'으로부터 성벽에 맞닿아 조성한 19m 길이의 치성(雉城)이다. 치성은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으려고 성벽 바깥 쪽에 돌출시킨 구조물. 이렇게 완전한 형태의 대규모 치성이 강화에서 드러나긴 처음이다. 강화도성 내·외부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관리하고, 성문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고 추정된다. 강화도성 구조와 운영 방식을 알 근거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성과다.

강화중성은 몽골 침략에 대항하려고 수도를 강화로 옮긴 이후 건립한 3개의 성곽(내성-중성-외성) 중 하나다. 토성으로 길이만 11.39㎞에 달한다. 1232년부터 1270년까지 강도(江都) 때 축조된 성곽 중 당시 모습을 가장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치성 주변에선 많은 기와와 문을 고정하는 문확석(門確石), 건물 기둥을 받치는 초석(礎石)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고려사'에 따르면 1250년 쌓은 강화중성 둘레는 2960칸이며, 성엔 크고 작은 문 17개가 있었다. 1259년 몽골과 화의하면서 훼철(毁撤·헐어서 치움)됐다고 전해진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2019년부터 강화중성 발굴을 시작해 오늘에 이른다.

이번에 조사 성과를 거둔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문화유산의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려는 목적으로 강화읍에 2017년 2월 문을 열었다. 강화는 물론 수도권 도성유적을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한다. 우리나라 역사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하는 중요한 유적들을 살피는 일이다.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할 기반을 마련한다. 그런 문화재 정책사업이 일관성을 유지해 국민들이 우리 역사를 배우고 익히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면 싶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