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권 단위 구분, 백성 살기 좋은 지역 찾아다녀
▲ 추양산인(秋陽山人) 유근(柳瑾), 조선광문회발간(朝鮮光文會發刊), 1912년 발간한 '택리지' 속지.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한 후 해마다 진귀한 서적과 국보급 문화재를 반출하였다. 이에 최남선(崔南善)·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 등이 조선광문회를 조직하였다. 조선광문회는 고전을 간행, 귀중 문서의 수집·편찬·개간을 통한 보존·전파를 목적으로 하였다. 아래 '택리지'는 이때 발간한 도서이다.

대선후보들의 토론과 경기도 국감에서 일부 국회의원들의 질문을 보며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가 생각났다. 더닝 크루거 효과는 인지 편향의 한 학설이다. 능력 없는 사람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지만 능력이 없기에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반대로 능력이 있는 사람은 능력이 있어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나을 거라 여겨 자신을 위축시키는 현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능력이 없는 사람 쪽이다. 이 사람들은 환영적 우월감으로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해 다른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곤경에 처한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온 나라 사람이 보는 벌건 대낮에 저 정도의 토론 실력과 저급한 수준의 질문을 얼굴하나 붉히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까지 높이는 저들이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이 참 경이롭기까지 하다. 찰스 다윈의 “무지는 지식보다 더 확신을 가지게 한다”는 말이 명언임이 분명하다.

지금도 이러한데 이중환 선생의 저 시절에는 어떠하였을까? 아마도 선생은 절벽 같은 심정으로 살아냈으리라. 2회를 이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2장을 살펴본다. 선생의 지리적 환경론이 2장에 그대로 나온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역시 지리적 환경으로 인하여 인간사회가 다르게 변함을 찾아냈다. 바로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이다. 이 두 부족은 한 조상(폴리네시아 인종)이었으나 모리오리족은 채텀 제도(Chatham Islands)에 정착하며 수렵 채집민으로 돌아갔다. 채텀 제도는 한랭한 기후를 지닌 작고 외딴 섬이었다. 모리오리족은 이 섬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남자 신생아의 일부를 거세하여 인구를 줄였고 저장할 땅도 공간도 작았기에 잉여 농산물이 없이 수렵 채집에 의존하며 살았다. 당연히 평화롭고 무기도 없었다. 강한 지도자도 필요치 않았다.

반면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북부에 정착했다. 영토는 컸고 농업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마오리족은 점점 인구가 불어났고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이웃 집단과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잉여 농산물을 저장하였으며 수많은 성채도 세웠고 무기는 강했다. 물론 강력한 지도자도 필요했다.

그로부터 500년 후, 뉴질랜드 북부의 마오리족은 채텀 제도의 모리오리족을 가볍게 점령해버렸다. 땅의 면적, 고립성, 기후, 생산성, 생태적 자원 등 지리적 환경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근대 선각자 최남선 역시 ‘실학 경시에서 온 한민족의 후진성’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생활환경이 우리 민족의 성격을 평화적이고 낙천적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18세기에 이미 지리적 환경과 인간의 삶을 다룬 청담의 '택리지'가 지닌 의의를 가늠할 수 있다.

선생은 '택리지'에 전국을 실지로 답사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자신의 관찰을 토대로 설명과 서술을 담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단순히 지역이나 산물에 대한 서술을 배격하고 사대부를 포함한 백성들이 살 만한 이상향을 지리적 환경을 이용하여 찾으려 하였다.

지역 구분 방식에서도 선생은 각 지방의 개성과 질을 중요시하였고 생활권 중심의 등질 지역이라는 개념을 도출해냈다. 선생이 국토를 생활권 단위로 구분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로 생각한 것은 산줄기였다. 각 지역은 하천을 통해 동일한 생활권으로 연결되지만, 산줄기는 하천 유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생이 늘 강조하는 실학적 사유에서 나왔다. 선생의 실학사상은 ‘복거총론’ “생리” 항 서두에 그대로 드러난다. 선생은 “무릇 세상에서 텅 빈 명망은 얻으려 치달리면서도 실용은 버린 지가 오래되었다(夫世之騖空名 背實用久矣).”라며 실용을 버리고 출세만 하려는 자세를 비판하였다. 선생에게 있어 사대부들의 출세는 텅 빈 명망이요, 실용은 바로 '택리지'를 짓는 자신의 사고였다.

'택리지'는 지역 간 교섭이요, 당대 문화의 역동성을 보여주기에 당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필사하는 품을 팔아도 가성비가 꽤 좋았는지 여러 이름으로 퍼져나갔다. '팔역지'(八域誌)·'팔역가거지'(八域可居地)·'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형가승람'(形家勝覽)·'형가요람'(形家要覽)·'팔도비밀지지'(八道秘密地誌)·'진유승람'(震維勝覽)·'박종지'(博綜誌)·'길지총론'(吉地總論)·'동악소관'(東嶽小管) 등 10여 종 이름의 필사본이 전해오는 게 그 반증이다.

'동국산수록', '진유승람' 등은 산수를 유람하기에 좋다는 의미에서, '동국총화록'은 우리나라 물산이 종합되었다는 의미로 상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형가요람'의 형가는 땅의 형세이니 풍수지리에 익숙한 사람이 지은 제목으로 보인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 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