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8월이었다. 당시 정무2장관직에 있던 그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서울 올림픽 유치를 범정부적으로 지원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지금은 헐려버려 형체도 찾을 수 없는 옛 중앙청에 있던 장관실에서 마주한 노태우 정무장관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 대표단과 함께 바덴-바덴으로 떠나는 필자에게 온화한 표정이었으나 단호하게 말했다. “신동지를 믿습니다. 올림픽 대회를 서울에서 열어 한국의 역사를 새로 씁시다,”

▶당시 조선일보사 정치부 차장으로 정부의 중앙부처 취재를 전담하다가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들을 많이 안다는 이유로 유치단 핵심 멤버로 참여했던 입장에서 살벌한 군사정부의 2인자 답지 않은 단호하면서도 온화한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바덴-바덴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예상외로 52대27로 꺾고 88올림픽 유치를 성공시킨 후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올림픽 때문에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후 정부 조직에 체육부를 신설하고 올림픽 준비 책임을 맡게 된 그는 필자에게 체육부 차관으로 와 달라고 했으나 언론계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대신 83년부터 두 번째로 프랑스 특파원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체육부 장관 노태우와 IOC회의를 비롯하여 주요 스포츠 종목 회의를 함께하는 기회가 잦았다. 올림픽 유치 단계부터 준비까지 군사정권의 명실상부한 2인자가 열과 성을 다함으로써 88올림픽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84년 LA 올림픽이 반쪽 대회가 된 냉전의 상징이 된 것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88 서울올림픽이 미국과 소련 양진영이 모두 참석하는 화합의 올림픽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광범위한 세계 각국 여행을 통해서 보고 배운 것이 공산진영과 국교를 트고 북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여행은 공부'라는 철칙을 스스로 이행하면서 6·29선언을 이끌어냈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올림픽 개최를 선언하는 행운을 누렸다.

▶1992년 고향 인천에 정착하기 위해 언론사를 떠나 국회의원에 입후보하기로 결심하면서 필자는 명분 없는 3당 통합을 한 여당으로 갈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평민당으로 입당을 결정하자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물론 김영삼 민자당 대표까지 극구 만류하는 상황이 되었다. 김영삼 대표의 설득도 집요했지만 노 대통령도 막판에는 당시 손주환 정무수석을 보내 지역구 공천 또는 전국구 20번 이내 그리고 1년내 입각을 약속하는 친서를 보내왔다. 없던 일로 하자면서 대통령 친서를 불에 태우자 당황해하던 손 수석에게는 물론 영면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도 삼가 유감의 뜻을 표하고 싶다. 물태우라는 별명을 오히려 물의 힘이 크다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보통사람 노태우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신용석 언론인